김천시 농소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농소면

지명유래

조선시대에 신곡. 조곡. 봉현. 둔동. 노산. 호동. 응곡. 농소. 신촌. 지동. 율곡. 대방 등 14개 동을 관할하던 농소면은 개령현에 속하고 면사무소는 농소에 있었다. 또한 연명리는 신라시대 연명향(延命鄕)으로 개령현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하면서도 김산현에 속하였다. 1906년 연명면으로 개편되어 본리. 조로. 송방. 입석 등 4개 동을 거느리고 개령현 농소면으로 이속 되었다. 한편 농소리(용시)에 있던 면사무소는 1906년 개편시 월곡 1리(밤실, 栗谷)로 이전되었고, 1993년 1월 12일 새 청사를 건립하였다.

김천시의 동쪽에 자리하고 동쪽으로는 남면, 남쪽으로는 성주군 초전면. 벽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감천면, 북쪽은 시가지와 이웃하여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남쪽의 3분의 2는 산악지대이고, 북쪽의 3분의 1은 평야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 있는 백마산(716m)이 북으로 뻗으면서 백마산과 고당산에서 발원하는 율곡천이 면의 중앙부를 북류하면서 양 기슭에 평야지를 형성하고 남면 초곡리에서 감천에 합류한다.

한편 백마산과 동쪽에 있는 산대봉(465.8M) 사이에는 연명천이 북으로 흐르며, 대체로 구릉지대를 이루어 과수원예가 발달하였다. 율곡천을 중심으로 월곡. 입석. 용암. 신촌의 대평야를 이루고, 김천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및 4호선 국도가 동서로 가로 지르고 있다. 특히 월곡. 신촌 평야의 농경지 정리를 196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준공식을 가져 농촌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입석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농소면에 속했으며, 1906년 김산군 연명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연명면이 농소면으로 통합이 되었다. 1936년 병자년 수해로 마을이 침수되어 반 이상이 양지바른 곳에 옮겨서 이곳을 새터라 불렀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율곡천이 마을 한가운데 흐르고 있으며, 선돌(立石)은 새터. 건너마. 달뱅이. 꿀뱀미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넓은 평야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면사무소와의 거리는 2km로 국도 4번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동쪽으로 마을 뒷산(303m)이 들어 앉아 있으며, 서쪽은 용암리. 봉곡 1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연명리와 남면 운곡이 이어져 있고, 북쪽은 월곡 1리와 남면 옥산과 접하여 있다. 선돌이라는 마을 이름은 많은 분포를 보이는 바, 문화적인 기원으로 보면 거석문화의 표징으로서 부족장의 무덤을 이르는 경우도 있고, 태양 숭배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영양의 입암(立巖)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선돌. 선둘. 입석(立石)
    • 마을 입구와 북서쪽 산에 암석이 하나씩 크게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봉곡동과 율곡동, 봉현동의 각 일부와 연명면 입석동 일부가 합하여졌다.
  • 달팽이. 애말리. 외말리. 팔미(八味)
    • 팔미들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부락으로 들 이름을 따서 팔미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들 한가운데 물을 대는 보에서 달팽이가 많이 나와서 달팽이라 불렀다. 또 외말리는 입석으로부터 바깥 마을이라고 하여 외말리라 한 것이 차츰 변하여 애말리라 부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촌리

조선시대부터 개령현에 속한 농소면의 마을로 본디는 싸리미. 사곡. 봉촌의 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동지 옆에 있던 사곡은 화적의 방화가 잦아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여 그 이름이 신촌이 되고 사곡은 없앴다. 1978년 싸리미 21집이 현대식 주택으로 개량하고, 봉촌에는 11집이 마을구조 개량의 시범촌이 되었다. 싸리미. 신촌. 봉촌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지고 농소면의 가장 북쪽에 자리하는 감천과 율곡천이 만나 흐르는 넓은 들로 경지정리가 잘 되었다.

경부선 철도가 봉촌 마을을 지나고, 또한 경부 고속도로는 싸리미. 신촌 중간을 동서로 가로 지른다. 남쪽은 넓은 들로 월곡 2리와, 동쪽은 남면 초곡, 용전과 율곡천을 사이하여 맞닿아 있다. 서쪽은 김천시와 이웃하고 북쪽은 감천을 사이로 개령면 황계동과 인접한다. 이곳은 김천내에서도 넓은 평야지대에 속하고 쌀생산을 주로 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농신촌. 신촌(新村)
    • 조선 중엽에는 관동못 옆에 큰 마을이 있었으나, 외세의 침입과 화적떼의 등살로 현재의 마을로 옮겨서 새마을을 만들었다 하여 신촌이라 하며, 마을 근처에 농막이 있다 하여 농신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 봉촌(鳳村)
    • 처음에는 하천변에 이름 없는 마을로 두세 집이 살면서 화적떼를 대접하였다 하여 봉촌이라 불러 오다가 지금은 봉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싸리미
    • 이 마을은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버드나 무가 많은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버드실. 유촌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월곡리

월곡 1리는 밤실(栗谷). 월천 두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율곡은 조선시대에 개령현 농소면 율곡동이었으나, 1914년에 율곡동과 농소리(용시). 남곡(藍谷). 지곡(안못골, 바깥못골)을 통합하여 월곡동이라 하였으며, 1971년에 율곡. 월천을 합하여 월곡 1동이라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바꾸었다. 천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래된 마을로 여겨지며, 1510년 밀양박씨 성표가 입향하였고, 1720년 김해김씨 처철(處哲)이 선산 송림에서 이주하여 두 문중의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완산최씨도 일찍 입향하여 그 집안에서 8대 진사까지 났다 하며 문중 재실인 율곡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후손은 거의 떠났다. 월천은 밤실에 살던 박희중이 1936년 병자년 수해로 집을 잃고 내 건너 이곳에다 집을 짓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졌다.

농소면 소재지로서 초등학교가 있으며, 4번 국도가 마을 앞을 동서로 지나고 동쪽 가까이에 율곡천이 북류하면서 넓은 평야지를 형성하였다. 율곡천을 사이로 동쪽은 입석리, 서쪽은 김천시 덕곡동과 무등산을 경계로 감천면 금송동과 접하고, 남쪽은 용암리, 북쪽은 월곡 2리와 접하면서 김천에서 4km 떨어져 있다. 또한 율곡천 제방을 낮추어 도로를 만들어 성주와 감천면, 조마면으로 가는 편이 편리하게 되었다. 지명의 분포로 보아 월(月)- 이 붙는 이름은 달(達)- 과 함께 높은 곳이거나 큰 곳 혹은 새로이 개척을 한 곳을 이르는 보기가 많이 있다. 여기서는 월천이 굽돌아 흐르는 어름쯤 해서 냇물의 작용으로 새롭게 생겨난 마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밤실. 율곡(栗谷)
    • 조선 영조 때 밀양박씨가 집단으로 마을을 개척하여 살았고, 그 후 김처철이라는 선비가 선산 송림 율곡에서 이주해 와서 보니, 이곳에도 밤나무가 많으므로 그곳의 지명을 따서 밤실이라 불렀다 한다. 지리서를 보면 밤은 중요한 먹거리로서 마을 이름이 될 정도로 밤의 생산이 관심사였다.
  • 월천동(越川洞)
    • 밤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1936년 율곡 마을이 병자년 수해로 침수되어 박희중 선비가 작은 내를 건너(越川) 새로 부락을 개척했다 하여 마을이름을 동음의 한자로 월천동이라 적었다.
  • 용시. 농신리(農神里)
    • 조선 인종 7년 의병 이정용이 임진왜란 후 당쟁 때문에 이곳에 은거하여 농사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하여 농신리라고 한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용시라는 사투리로 부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이곳 주민 모두가 농사를 잘지어 신농씨(神農氏)로 불리어진 것이 농신으로 변했다고 한다.
  • 남곡(南谷)
    • 김중식이라는 선비가 약 300년 전에 개척하였으며, 이곳의 지형이 사방 산으로 둘러싸이고 아담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부근 구릉지에서는 과수원 단지가 형성되어 사과. 포도. 복숭아. 자두가 많이 생산된다.
  • 안못골. 내지(內池)
    • 약 300년 전에 대홍수가 있어 못이 생겼는데 못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못골 또는 내지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는 밭이 많아 사과. 포도. 자두 등의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 바깥못골. 점못골. 외지(外池). 옹점(甕店)
    • 못골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외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 이곳에 옹기전이 있어 옹점이라는 이름도 같이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용암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농소면 소마리였으며, 1914년 이웃한 대방리와 소마(씰미. 洗麻)를 합하여 용암동이라 하였고, 1971년 씰미를 나누어 용암 1동이라 하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농소면 가운데서 서쪽 끝에 있으며, 월곡 1리에서 율곡천을 따라 남쪽으로 500m 지점 용암교에서 서쪽으로 갈려 들어가 약 600m에 자리한 산촌 마을이다. 씰미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아랫덤이 있고, 동쪽으로는 윗덤이 있으며, 윗덤에서 동쪽으로 샛덤이 있다. 앞들 율곡천변에는 숲마을 과수단지가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씰미. 소마(所麻). 세마
    • 마을 근처의 토지가 비옥하여 예로부터 삼이 잘 되고, 마을 사람들이 길쌈을 잘하여 마포 생산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동민이 소마 또는 세마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씰미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 봉곡천 가까이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인가가 들어서기 전에는 냇가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 광복 후부터 개척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므로 마을 이름을 숲이라 부르게 되었다. 개척된 땅에는 사과나무를 심어 부근 일대가 과수원으로 변모되어 많은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 대방골. 대방(大方)
    • 용암동 서쪽에 있는 부락으로 마을이 긴 방천의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대방(大坊,大防)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봉곡리

가장 오래된 마을 샙띠(鳳峴)는 조선시대에 농소면 봉현리였으며, 우봉골 자연마을은 1945년 해방 후 일본 폐전에 모여든 봉곡민의 새 개발지역으로 난민을 정부에서 집을 지어 주고 이 곳에 정착시킨 마을이다.

1914년 일본인들이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봉현리. 사실.노산을 합하여 봉곡동이라 하였으나. 1971년 샙띠를 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 동이 리로 바뀌었다. 면소재지에서 길을 따라 남쪽으로 3km 지점 내(川)를 건너면 우봉골 마을이 있으며, 이곳에서 남으로 400m 지점 양쪽 길가에 큰 마을이 샙띠이다. 동남쪽은 고방사를 안은 백마산(716m)이 가로막아 성주군 초전면과 이웃하고, 서쪽은 응봉산(523m)이 막아서 감천면 무안리와 사이하며, 이 마을은 비교적 넓은 구릉지를 이루어 과수원이 발달했다. 마을 뒷산에 철새 왜가리가 여름철을 지낸다.

이로 보면 여기 봉곡의 봉(鳳)은 왜가리를 미화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지리서를 보면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은 모두가 새(鳥)였으니 새- 사이로 보아 어느 지역의 사이를 기본적인 뜻으로 상정할 수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샙디. 샙띠. 새티. 봉현(鳳峴)
    • 옛날 이 마을 부근에 학이 많이 날아와 겨울을 났는데, 학이 많이 날아오면 마을이 흥하고, 적게 날아오면 동세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학을 보호했다고 한다. 샙디. 샙띠. 새티라는 이름도 큰새 즉 학이 떼를 지어 살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우봉골
    • 인가가 들어선지 약 20년 밖에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인데, 우봉골이라는 골짜기 어귀에 위치한다고 우봉골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 사실. 조곡(鳥谷)
    • 마을 부근에 큰새 학이 많이 서식하여 조곡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하며, 또 이 마을 부근에 고방사라는 절이 있는 바 이 절로 인하여 사실이라고도 일컬어졌다는 설이 있다.
  • 노산(盧山)
    • 사실의 서쪽 가까이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마을 근처에 갈대가 많아 노산이라고 이름지어 졌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연명리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개령현에 자리하면서도 김산군에 속한 연명향(延明鄕)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 이웃한 숫골(水梧里, 松方). 입석동. 노곡동 등 4개동을 거느리는 연명면의 면소재지로 본리가 되었다. 1914년 연명면이 농소면에 들게 된다.

본리는 연명동으로 격하되고, 1988년 동이 리로 바뀌었다. 오늘날에는 연명리 마을에는 옛 면소재지의 발자취로 300∼500년된 고목과 석탑이 무너진 돌거북돌 등과 함께 마을 입구에 남아 있다. 4번선 국도변 팔미에서 남쪽으로 갈리어 3.5km 지점에 비교적 넓은 평지와 연명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1km지점에 수오 마을이 있다. 마을 어귀에 초등학교가 있고 돌무덤의 서낭당이 포구나무 그늘이 만들어져 있다.

동쪽은 산대봉(비봉산 465.8m)이 솟아 남면과 사이하고, 서쪽은 백마산이 솟아 북으로 뻗으면서 봉곡 1리와 사이하며, 남쪽은 좁은 골짜기로 노곡리로 이어지고, 북쪽은 입석리와 들판으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연명(延明)
    • 옛날 이곳 주민들이 큰 홍수를 당하여 배바골이라는 산에 배를 매어 목숨을 구했다 하여 부락명을 연명(延命)이라 불렀던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연명(延明)으로 바뀌었다 한다.
  • 수골. 숫골. 수오(水梧)
    • 연명동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앞에 큰 오동나무가 서있었다고 하여 부락명을 수오(樹梧)라고 불러오다가 지금은 물 수자 수오(水悟)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노곡리

조선 중기까지는 개령현 농소면에 속한 노곡동이었는데, 그 뒤 김산군 소속의 연명면에 들게 되고, 1914년 농소면에 합쳐졌으며, 1988년에 동이 리로 바뀌면서 노곡리가 되었다. 농소면 동남쪽 끝에 자리한 가장 오지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은 비백산(466m) 이 남면 송곡과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백마산의 줄기가 북으로 뻗으면서 봉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활굿재를 넘어 성주군 초전면에 이르고, 북쪽은 연명리로 이어지는 들판이 있으며, 논밭이 기름져 주민의 소득이 높은 포도와 마늘을 재배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노리실. 노루실. 노곡(老谷)
    • 옛날 연명이 개령현 연명면의 소재지일 때 관직에 봉직하고 있던 하급 관직 중 나이 많은 사람은 관직을 그만두고 이 골짜기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을 노루실이라 불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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