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남면
둘레 약 3,500m. 남문 ·서문 ·중문 ·암문(暗門) 및 건물터가 남아 있다. 높이 977m의 금오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內城)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었으며, 천연의 암벽이 태반을 차지한다. 고려 말 선산 ·안동 ·개령 ·성주 등의 많은 주민을 징발하여 산성을 수비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1410년(태종 10)~1413년에 성을 수축하였다. 이 무렵 성내에는 3개의 못, 4개의 샘에서 계곡물이 흘렀으며, 군창이 있던 것으로 보아 천혜의 요새로서 상당한 규모로 수축, 정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방상의 요충으로 부각되어, 1595년(선조 28) 성벽을 수축하여 승병대장 사명(四溟)도 이에 참여하였다. 1639(인조 17)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내성과 외성을 다시 쌓았다. 1735년(영조 11)에는 선산도호부사가 산성별장(山城別將)을 겸하는 거진(巨鎭)이 되어 상주 군병 3,500여 명이 배속되었다. 1868년(고종 5) 마지막으로 수축하여 당시의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가 산정 부락터에 남아 있다.
갈항사터에 남아 있는 석불이다. 1978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두드러진 눈, 긴코, 작은입, 둥글고 풍요로운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파손이 심하여 바른쪽 엉덩이와 팔이 떨어져 나갔고 무릎 밑은 땅에 묻혀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도 이 불상이 우수한 조각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석불과 함께 있었던 두 석탑은 서울 경복궁에 옮겨져 국보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승려 가귀가 총명하여 도리를 알아 승전법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심원장을 지었는데 그 심원장에는 승전법사가 해골 화석 80개를 초석으로 하고 화암종의 갈항사를 지었다 하고 그 화석의 무리를 거느리고 불경을 강론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