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개령현에 속한 옥산. 봉천. 오봉. 초곡. 운남. 용전 마을을 거느리는 적현면(赤峴面)과 송곡. 운곡. 월명. 부상 마을을 거느리는 남면의 2개 면이었는데,1914년에 통합하여 남면이라 하고 10개 동을 관할하였다. 1916년 운남동 종상에 있던 적현면 사무소를 폐쇄하고 옥산에 남면 사무소를 신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천시 동쪽에 자리하면서 금오산이 막아서서 그 동쪽은 칠곡군과, 서쪽은 평야지에서 농소면, 남쪽은 비백산과 백마산, 성주군 초전면과 경계를 이룬다. 서원동이 송곳같이 뻗어 그 끝이 감천에 이르고 그 건너편은 개령면과 이웃한다. 중앙부에 운남산(376.8m)과 절골산(380.4m)이 나란히 솟고, 남쪽에는 선대봉(465.8m)과 사모실산(260.4m)이 나란히 솟는 사이에 오리내(川)가 북으로 흐르면서 봉천동에 평야지를 이루고 오봉저수지가 만들어져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있다. 동쪽은 금오산이 높게 솟아 구미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 농소면과의 사이에는 송곡천과 율곡천으로 평야지가 발달하였다. 대체로 남면은 평야지대로 곡창을 이루고 있다.
옥산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적현면(赤峴面)에 속한 옥산동인데, 1914년 지산. 석정을 통합하여 옥산동이라 하고 남면에 속하였으며, 1916년 남면사무소를 운남동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971년 옥산 마을을 분리하여 옥산 1동이 되고, 1988년 동을 리로 고쳐 옥산 1리가 되었다. 4번 국도변 팔미에서 북으로 갈려 들어가서 400m 지점 평야지에 위치하는 남면사무소 소재지로서 각종 기관단체가 있다.
동쪽은 노고봉(346m)이 가로막고, 서쪽은 송곡천과 율곡천이 합류하면서 넓은 신강들을 안고 월곡동과 이웃하여 북쪽은 운남으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옥산(玉山)
- 조선 중엽에는 이 곳에 옥이 있어 옥산(獄山)이라 하였다가 조선 말엽에 옥이 철거되자, 이 마을 주민들이 옥산(獄山)이라는 말은 한자의 뜻이 좋지 않다고 하여 구슬 옥자 옥산(玉山)으로 개칭하였다.
- 모산. 지산(地山)
- 약 1500년 전에 이 마을을 지나던 어떤 고승이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므로, 동네를 이루면 번창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마을 이름은 못이 있으니 지산(地山)이라고 하면 좋다고 하여 현재까지 지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운곡리
본래 개령현 남면에 속했는데, 1914년 운양동과 마곡동의 각 일부와 연명면의 송방동 일부, 그리고 농소면의 둔곡(屯谷) 일부를 합하여 운양과 마곡의 이름을 따서 운곡동이라 했다. 1988년 동을 리로 고치면서 운곡리가 되었다. 운양리. 둔곡리의 두 마을로 구성되었다. 둔곡은 남면 소재지에서 2.8km 떨어진 4번 국도변 남쪽에 있으며, 운양리는 국도 북쪽 송곡천 냇가에 있다.
작은 평야를 제외하고는 산악지대로 동쪽은 국도를 따라 송곡리, 남쪽의 비백산이 서쪽으로 뻗어 입석동과의 사이를 이루고, 북쪽은 진골산과 운남산이 이어지면서 가로막아 운남과 경계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운양(雲陽)
- 이 마을은 양지에 위치한 곳이라 하여 운양이라 하였다 한다. 면 소재지 옥산에서 남동쪽으로 2.8km 떨어졌고, 인근 부락 등곡과의 거리는 500m이다.
- 등골. 등곡
- 조모 씨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마을의 앞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개령현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이곳을 구름이 머무는 큰 골짜기라 하여 운용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송곡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남면이었는데. 1914년 솔방(松坊). 살구점. 마곡(麻谷)을 합하여 송곡동이라 하고, 1971년에 솔방. 살구점을 분리하여 송곡 1동이 되었다.
남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4번 국도를 따서 5km 어름 길가 남쪽에 솔방 마을이 있고, 이곳에 부상고개를 넘으면 부상리, 서쪽은 운곡리와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솔방(松坊). 주막거리
- 약 950년 전 한모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마을 주변에 솔이 많다 하여 솔방이라 불렀고, 마을 앞길은 옛날 성천 지방에서 개령으로 가는 통로로서 주막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거리라고 하게 되었다
- 살구짐. 자기점(滋器店)
- 이곳은 살구나무가 많은데, 살구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하여 살구짐이라 하였고, 또 옛날에 이곳에서 토기를 구었다고 하여 자기점이라고 한다.
- 안솔방
- 이곳은 솔방과 인접한 곳으로 솔이 많았고 개천과 능선을 중심으로 안쪽에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안솔방이라 하였다.
- 진골. 마곡(麻谷)
- 마을 뒷편에 산이 있고, 이 산에서 뻗어 내린 아주 긴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한다. 그래서 진골이라 하였고, 고려 말엽 이곳에 마곡사가 있어 마곡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월명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남면에 속한 신전인데, 1914년에 이웃한 운봉리. 동릉을 합하여 월명동으로 개편하고, 1971년 신전을 나누어 월명 1동으로 했다. 면소재지인 옥산 1리에서 4번 국도 동쪽 9.5km 지점에 있는 남북 저수지 옆에 있다.
금오산과 영암산이 남북을 가로 막아 좁은 골짜기가 동서로 숨통을 트고 마을 북쪽 아래로는 못이 있다. 905번 지방도로가 남쪽 성주가 통하는 갈림길에서 가깝다. 동쪽은 칠곡군과 이웃하고, 남쪽은 성주군과 인접하며 김천시 동부에 자리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섶밭. 말고리. 신전(薪田)
- 전에 숯을 굽던 밭이 있었다고 하여 섶밭이라 하고, 옛날 개령을 넘어가려면 이곳을 지나게 되는데 어떤 고을 원님이 이곳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유숙하고 간 곳이라 하여 말고리라 한다.
- 운봉(雲峰)
- 백운산과 금오산 중간에 있는 마을로 그 지대가 높아 이 곳에서는 구름이 쉬어서 넘어가며 구름이 덮여 햇볕을 잘 볼 수 없다고 하여 운봉이라고 했다. 추풍령으로 가는 고개이며 20 가구 정도의 영월엄씨가 살고 있었다.
- 동릉. 상릉(上陵)
- 이곳에 능(陵)이 있는데 능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릉으로 부르고 능 위쪽에 있어 상릉이라 부른다.
- 하릉(下陵)
- 마을이 상릉아래에 있다고 하여 하릉이라 하였다. 운봉과의 거리는 1km 정도이며 성주와 부상의 경계 지점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부상리
1450년 무렵 조선 문종 원년에 김모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신라시대부터 부상이라 불리었으며, 우륵이 부상에서 나는 명주실로 가야금을 만들었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부상역을 두었기 때문에 역촌이라고도 불렀다. 1914년에 인근의 모산골(池山谷). 사모실(池谷) 등 작은 마을과 지경리를 합하여 역시 부상동이라 하고, 1971년에 부상. 모산을 사모실을 따로 분리하여 부상 1동이 되었다. 1988년에는 동을 리로 고쳤다. 1957년부터 4일 9일 장이 섰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부상은 남면 소재지(옥산 1리)에서 동으로 12.6km 떨어져 4번 국도변에 있고, 사모골. 모산골은 부상에서 남으로 2km 떨어진 골짜기에 있다. 마을 동쪽 국도변에 남북지가 있고, 부상 마을에 초등학교가 있으며, 앞산에는 백운암이 있고 산에 가로 막혀있다. 구릉지대인데 신라시대부터 근래까지 누에치기로 이름이 났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역말. 부상(扶桑)
- 옛 개령군 남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 시대 부상역이 있었으므로 역말이라고 하였고, 또 뽕나무가 많아서 부상이라고 하였다. 신라시대 가야의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만들 때 부상에서 나는 누에고치에서 만든 명주실로 가야금줄을 매었다 한다.
- 도현(挑峴). 도지미
- 이 마을은 병자년 수해 때 기를들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면서 생긴 마을로서, 돌아가는 고개에 위치하였다 하여 도지미. 도현이라고 부른다.
- 모산골. 지산곡(池山谷)
- 부상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안에 못이 있고, 산이 있다 하여 모산골이라 하였다.
- 사모실. 사곡
- 부상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옆 마을인 모산골을 거꾸로 부른 데서 사모실이라 하였고 사모실 앞 동쪽에는 옻샘이 있다고 한다.
- 지경(地境)
- 김천시 남면과 칠곡군 북삼면의 경계에 있는 곳이라 하여 지경이라고 불렀다. 부상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오봉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남면에 속한 오수동. 봉곡동이었는데, 1914년에 갈항동과 통합하여 오봉동이라 했다. 1971년에 모래동. 봉곡. 갈손. 오수. 원골을 오봉동에서 분리하여 오봉 1동이 라 하고, 1988년 동을 리로 고쳤다. 연봉천 냇가와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모래동. 봉곡. 갈손. 오수. 원골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동은 제석봉의 남주맥이 막아 대성동과 경계하고, 그 골짜기에 갈손. 오수마을이 있으며, 남은 금오산과 절골산이 맞닿으면서 그 사이의 갈항 고개를 넘으면 부상에 이른다. 중앙에는 연봉천을 막아 오봉 저수지를 만들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원골. 원곡(院谷)
- 봉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서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원골 혹은 원곡이라 불렀다. 인근 봉곡과의 거리는 1km이며 현재 28가구에 114명이 살고 있다.
- 봉곡(鳳谷)
- 마을 뒤의 골짜기가 봉의 형국같이 생겼다고 하여 봉곡이라 한다. 남면 소재지인 옥산에서 8.3km 떨어진 부락으로 주로 이씨. 김씨. 나씨 등이 살고 있다.
- 오수(梧水)
- 나부정이라는 선비가 임진왜란 때 이곳에 파란와서 개척한 마을인데, 다섯 골짜기가 이 마을을 둘러싸며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오수라 했고, 또 이곳에 샘을 파서 물을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고 하여 나병 환자들이 여기에 모여 살면서 마음껏 물을 마셨다고 한다.
- 강항. 갈항(葛項)
- 약 1,600년전 김상집이라는 선비가 마을 개척 당시 칡덩굴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며, 또한 신라시대 갈항사라는 사찰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지금 갈항사 절은 없으나, 그 절 터에 보물 제245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문화재로 남아 있으며, 갈항사 동서쌍탑은 일제때인 大正5년 1월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는 조선 총독부의 비가 서있으나 현재 경복궁에 안치되어있다. (「갈항사 조탑기」는 중요한 이두 자료이다. 국어 사적으로 주목되는 문화 유적이다.)
- 씨집메. 삼가촌(三家村)
- 약 60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세 집만 살았다 하여 삼가촌이라고 불렀으며, 옥산에서 동으로 7.7km 떨어졌고 이웃한 우장과의 거리는 1.1km 이다. 세 - 시(씨)로 보아 셋에서 소리가 바뀌어 굳어진 경우이다.
- 쇠바탱이. 우장(牛場)
- 이곳은 금오산성에 식량을 운반할 때 소를 매어 두던 곳이라 하여 우장이라 하고, 남면 옥산동에서 동으로 9km 떨어져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봉천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적현면에 속한 연봉리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말로 설개라고 하고 한문으로 설광으로 적었다. 1914년에 샘골(泉洞)과 합하여 봉천동이라 하고, 남면 관할이 되었다. 1971년 연봉을 나누어 봉천 1동이 되고, 1988년 동을 리로 고쳤다.
남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6km 떨어진 평야지대로, 동쪽은 연봉천(오리내)이 북으로 흐르면서 넓은 봉천들이 이루어지고, 내 건너는 제석동이고, 남쪽은 낮은 산이 들 가운데에 앉았고 서쪽은 들로 봉천 2리(泉洞)로 이루어지고, 북쪽은 대신리와 이웃한다.
설 - 살 - 사이의 대응으로 보아 지역을 경계하는 사이로 흐르는 냇물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설개이. 설광(雪光). 연봉(延鳳)
- 1350년 조모씨가 이곳을 개척하여 눈빛 같이 희고, 아름답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하여 설자와 광자를 따서 설광이라 불렀다고 한다.
- 새암골. 천동(泉洞)
- 1952년 박모씨가 임진왜란 당시 피란 와서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주변에 하천이 없어 작은 우물을 많이 파서 농사를 짓는 곳이라 하여 천자를 따서 천동이라 불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초곡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적현면에 속한 초곡인데, 1914년 서원마을을 합하여 초곡동이라 하고 남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동을 리로 고쳤다. 남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4km 떨어진 야지에 있는 초곡. 서원 마을이다. 초곡의 동쪽은 비봉산이 가로막고, 서쪽은 율곡천이 북류하여 감천에 합류한다.
서원마을은 송곳같이 남면의 북단에 뻗어 끝이 감천에 닿았다. 남서쪽에 동북으로 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 및 구미 - 김천간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셀. 초실. 초곡동(草谷洞)
- 고려 때 정모씨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억새풀이 많다 하여 셀 또는 초실이라 하였고 조선 때 셀을 한자로 표기해서 초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풀을 새라고도 이르는 바, 초곡 - 새골의 대응이 가능하다.
- 서원
-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곳에 집을 지어 책을 읽고 글을 짓고 강론하던 곳인데, 서원의 이름을 따서 이 마을을 서원이라 부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운남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적현면에 속한 종상동인데, 1803년에 부임한 개령 현감의 이름이 종상(從祥)으로 마을 이름이 수령의 이름과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경호동으로 바꾸었다가 퇴임 후 다시 종상으로 환원했다. 1914년에 종상을 주축으로 석정동과 이웃한 지산. 용전의 일부 지역을 합하고 운남산의 이름을 따서 운남동이라 하고, 1971년 종상을 나누어 운남동으로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진 야산지대에 있는 큰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 용전에서 오봉으로 가는 길이 있고, 남쪽에 운남산이 막아 섰으며, 동쪽은 봉천리와 이웃하고, 서쪽은 용전과 인접해 있다. 마을 동쪽 산 모통이를 돌면 공동묘지가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종상(從上). 경호
- 신라 진흥왕 때 강정년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용이 용전에서 나와 이곳으로 갔다 하여 종상이라 하였는데, 1803년 개령현 현감의 이름이 종상(鐘祥)이므로 음이 같다 하여 달리 경호로 고쳤다가 그 현감이 퇴임하자 다시 종상이라 불렀다.
- 돌정지. 석정(石井)
- 1596년 임지왜란 때 수원백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중앙에 돌로 된 우물이 있었다 하여 돌정지 또는 석정이라 불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