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의 서안에서 모암산 중간지점까지의 시가지 지역 일대인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신기·하신기로 일제시대에 상신기는 나시키마치(錦町), 하신기는 혼마치(本町)·아사히마치(旭町) 등 일본식 이름으로 명명되고, 광복후에는 우리말 이름 용두동(本町)·감호동(旭町)·모암동(錦町)으로 고치고, 1993년에 감호동과 용두동을 합하여 용호동(龍湖洞)이 되고, 1998년에 용호동과 모암동을 합하여 용암동(龍岩洞)이 되었다.
| 조선시대 | 1914 | 1946 | 1993 | 1996 |
|---|---|---|---|---|
| 하신기(김천장터) 일부 | 본정(本町) | 용두동 | ||
| 하신기(김천장터) 일부 | 욱정(旭町) | 감호동 | 용호동 | |
| 생신기 일부 | 금정(錦町) | 모암동 | 모암동 | 용암동 |
김천시의 동쪽으로 보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내의 서안에 접하여 있다. 국도를 경계로 하여 남쪽이 용두동, 북쪽이 감호동이다. 용두동의 남쪽은 황금동의 주거지와 연접하여 있으며 북쪽은 감천과 합하여 흐르는 직지천(直指川)이 신음동과 마주하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랫장터·짐천장·김천시장 혹은 하신기(下新基)라 불렀으며 전국 5대 시장의 하나였다. 1905년 무렵 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를 놓을 적에 일본인 기술자 수백명이 임시로 거처할 집을 지었다고 한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도 임시로 지은 집을 헐지 않고 그대로 남아 차츰 상가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인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권을 차지하였다.
국도를 경계로 하여 감천의 남쪽을 혼마치(本町), 북쪽을 아사히마치(旭町)라 하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 정식 마을의 이름으로 확정지어 불렀다고 한다.
광복이 되면서 우리말로 마을의 이름을 고쳤는데 본정을 용두동, 욱정을 감호동이라 하였다. 다시 1983년 김천시의 조례에 따라서 감호동과 용두동을 합하여 오늘날의 용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르자면 행정동 이름이 용호동이고, 법정동으로는 여전히 감호동과 용두동으로 나누어진다.
땅이름의 보기를 살펴보면 용(龍)과 관련한 예가 많이 나온다. 이는 물신으로서 용을 섬기는 용신앙의 바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 용을 구체적으로 관련 짓는다면 다름 아닌 감호 곧 감천의 물로 보아야 한다.
법정동의 이름과 그 유래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마을 가운데에는 모암산이 앉아 서쪽 성내동까지 뻗쳐 있고, 산의 북쪽 기슭으로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남으로는 경부선을 중심으로 하여 남산동과 연접하여 있으며, 북으로는 서에서 북으로 흐르는 직지천을 연접하여 신음동과 이웃하여 자리하고 있다. 일정 시기에 상권을 장악한 일본사람들은 1908년에 마을이름을 일본식으로 니시키마치(錦町)라 하였다. 이 시기에 김천역과 아랫장터를 잇는 국도가 개설됨에 따라서 모암동은 아주 빠르게 시가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김천시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자산의 동·남·북 삼면을 에워싼 상가 및 주택지구역이다. 1901년까지는 인가가 없었고 자산을 사이에 두고 동으로 흐르는 감천과 남으로 흐르는 직지천의 합류지점으로 대부분이 소택지이고 군데군데 저습답이 있을 뿐 인접한 천변에 장날이면 지금의 감호시장인 장이 설뿐이었다.
그 이후 일본인들의 상가가 점차 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김천 상가의 중심으로 발전되어 갔다. 1914년 김천면 금정으로 일본식 동명이 붙여졌고 광복후 1947년 자산 동남쪽에 우뚝 솟은 사모바위 일명 삼바위를 지명으로 삼아 마을이름을 모암이라 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