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양금동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양금동

설화

할미바위

김천에서 거창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황금동과 양천동의 경계 지점, 산밑 도로변에 높이 2m 정도 구부러진 바위가 있다. 바위 뒤에 솟아 있는 산은 할미산(姑城山.高城山)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은 김천을 지켜 주는 진산(鎭山)이다. 수호신인 이 할미가 때때로 할미바위에 내려와 깃들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은 여행 중에 만날지도 모르는 액운을 막아 달라고 절을 하고 빌었으며, 아이 못 낳는 부녀는 득남을 빌기도 하였다. 또 바위 위에 돌을 던저 얹혀지면 길사를 만나고 떨어지면 흉사를 만난다 하여 길흉을 점쳤기 때문에 바위 위에는 돌이 쌓여 있으며, 음력 정월이면 금줄이 쳐지기도 하였다. 이 밖에 또하나의 전설이 있다. 옛날 동방에서 남신이 날아와 모암산에 있는 사모(紗帽)바위에서 춤을 추고 노닐면, 황악산에서 여신이 할미바위에 날아와 둘이서 교합했다고 한다. 이 두 남녀신이 혼인 하게 되면, 하로(賀老)는 상객방(上客房)이 되고, 감천 건너 황산은 병풍 구실을 했으며, 혼례잔치에는 하객이 많아 유기그릇을 많이 만들어 내어도 모자랐고, 아랫장터의 진어물골목(건어물골목)에는 잔치에 쓸 건어물이 모자랐다고 한다. 근래까지도 할미바위에 금줄이 쳐져 있었는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나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절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

학사대(學士臺)

김천의 남산공원 뒤쪽 황금동에서 남산동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개운사 앞을 '학사대'라 부르는데 지금은 유치원이 세워졌다. 이곳은 신라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학문을 강론하고 소요하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함양에도 학사루가 있는데, < 동국여지승람 >에는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으면서 등림(登臨)하던 곳이라 하여 후세에 학사루를 지었다고 했는데, 경주.함양 그리고 이곳 김천에 최치원과 관계되는 학사대가 있다. 김천 학사대는 함양과 같이 최치원이 어떤 관직으로 머물 렀던 것인지, 또는 지나는 길에 일시 머물며 강론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옹(韓雍)의 묘터

한옹은 조선 초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하로에서 살다가 74세로 별세하였다. 세종(世宗)이 예관을 보내어 장례식을 올리고 하로 동쪽 안산(案山)에 잡은 묘지를 향하여 상여를 운구하는데, 묘자리에 이르자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일어 상여를 덮은 차일막(遮日幕)이 훨훨 날아 동쪽 건너산 안정개 남쪽 배밭골(梨谷. 이곡) 중허리에 떨어졌다. 하늘이 찾아준 명당이라 하여 차일막이 떨어진 곳으로 장지를 옮겨 안장했다는 것이다.

아랫고개의 단기(斷氣)

김천시 양천동 중리마을에서 동쪽 산 너머 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아랫고개인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하로(賀老)의 지세가 너무 좋아 장차 큰 인재가 나서 중국을 괴롭힐 것을 염려하여 이 고개를 끊어 하로의 정기(精氣)를 꺾어 버렸다고 한다.

괘편암(掛鞭岩)과 투갑연(投甲淵)

하로에 살던 평정공(平靖公) 이약동(李約東)이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이야기이다. 재임 기간에 쓰던 관물인 관복이나 물건들을 정리하여 모두 관청에 두고 떠났는데, 말을 타고 나룻터까지 오다가 문득 손에 쥐고 있는 말채찍이 제주도의 관물임을 깨닫고 되돌아가 그 채찍을 성벽 바위에 걸어놓고 다시 떠났다. 공의 수행원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바다 중간쯤에 이르러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 곧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일행은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공은 태연히 "우리 일행 가운데 혹시 섬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이 없느냐?" 고 물었다. 만약 섬 물건을 가져오다가 여기서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뒷날 섬 사람들이 탐관이라고 죽은 뒤에도 욕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비장이 아뢰기를, "섬에서 떠나올 때 섬 사람들이 금갑옷 한 벌을 주면서 배를 타기 전에 사또님께 바치면 물리치실 것이니 배에서 내린 다음에 드리라 하여 가져왔습니다." 하였더니, 공은 웃으면서 그 정성은 고맙다 하고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곧 풍랑이 가라앉고 무사히 건너왔다. 제주도 사람들은 공의 청백과 선정을 기념하여 성벽에 걸어 둔 말채찍을 그대로 걸어 두고 보존하였더니, 오래되어 썩은지라 그 자리에 채찍 모양을 돌에 새겨 그 바위를 '쾌편암(掛鞭岩)' 이라 부르고, 또 갑옷을 던진 바다를 '투갑연(投甲淵)' 이라 이름하였다. 공의 청렴을 기리기 위하여 제주도민은 '생사당(生祠當)'을 지었는데, 산 사람을 위해서는 사당을 짓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런데 후손이 바르게 받들지 못하고 공의 청백에 오류를 끼쳤다. 숙종 원년에 부호군 이선(李選)이 제주를 순무하고 돌아와 제주 40폐단을 왕에게 보고한 가운데, 3현 (金淨<김정>. 金尙憲<김상현>. 鄭溫<정온>) 을 제사하는 서원에 제주목사 이연이 그의 조부 이약동의 위판을 사람들과 상의도 없이 3현 윗자리에 배향하여 3현을 욕되게 하였다고 고했다. 왕이 철거토록 했는데, 만약 이약동이 지하에서 안다면 청렴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크게 꾸지람하였을 것이다.

누리집 서비스 향상을 위해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페이지의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