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평화남산동
영신당붓은 서예가나 동양화가의 구원의 필구이다. 거창군 주상면이 고향인 이팔개씨는 한평생을 붓으로 지내면서 이젠 붓하면 이팔개로 정평이 났다.
그가 붓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용두동에 있던 "이진희 필방"에서 붓만드는 기술을 익히던 18세부터이다. 3년간 기술을 익히고 붓으로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전국에서 이름난 부산의 "대신당 필방"으로 옮겼다.
2년 6개월 동안 붓만드는 기술의 진수를 익히고 김천으로 돌아와 "영신당 필방"을 열었다. 그때나이 24세이고 오늘까지 붓에만 매달렸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에 100~150자루의 붓을 매일 만들었는데, 지금은 나이탓인지 20~30자루가 고작이라고 한다.
그가 만드는 붓의 종류는 초필. 인장필.미간.간필.주름필.중간필.중간대필.대필.소각.중대.액자 등 12가지 인데 털의 종류와 붓의 종류에 따라 제각기 과정이 다르다. 하나의 붓을 만드는데 75회가 넘는 잔손질이 가야한다는데 정교한 손 감각과 장인 정신이 좋은 붓을 만든다고 한다.
금릉지에 따르면 김천도에 옛날부터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금지천 즉 김천이라 하였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과 향기가 매우 좋아 그 샘을 주천이라 불렀다. 그 샘이 지금의 과하천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과하천 물로 빚은 김천과하주는 익산의 여산주와 문경의 호산춘과 더불어 전국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타지방 사람이 김천 사람에게서 술빚는 방법을 배워가서 같은 방법으로 빚어도 김천의 술맛이 나지 않는데 이는 이곳 샘물이 다른 곳의 샘물과 다르기 때문이라 했다.
금지천은 묻혔지만 지금의 과하천은 오래전부터 "과하주샘"으로 불려 오고 있으며 1882년에는 샘 뒤에 "금릉주천"이라고 돌에 새겨 세웠다.
"큰도가"(김천주조회사)에서 이 샘물을 길러다가 과하주를 생산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광복 후 재개했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정월 보름날을 전후해서 "큰도가"에서 과하주 샘물을 긷는 물지게꾼의 행렬이 길게 뻗은 광경은 볼만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