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증산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증산면

지명유래

조선시대는 성주목(군)에 속해 있었으며 관내에 있는 시루봉(甑峰)의 이름을 따서 증산면이라 칭하였고 37개동을 관할하였다. 1895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주군 외증산면과 성주군 내증산면으로 나누어졌다.

그 뒤 1906년에 내증산면은 지례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 다시 외증산면도 지례면에 병합 되었다. 한편 내증산면은 증산면이라 개칭하여 김천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29개동을 부항· 동안·황정·평촌·유성·금곡·황정·수도·장전·황점의 10개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1949년에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금릉군 관내에 들었다. 1973년 유성동을 1, 2동으로 분할하여 11개동이 되었다. 김천시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경남의 도계를 이루며 김천시청에서 면 소재지인 옥동까지는 32km거리이다. 동은 성주군, 서는 대덕면, 남은 경남 거창군, 북은 지례면과 접경하고 있다. 면 주위가 수도산(1,317m)·단지봉(1321m)·목통령·형제봉(1022m)·삼방산 등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산의 면적이 전체 넓이의 86.5%를 차지하는 김천시 제일의 산간오지 이다. 북의 황항 및 부항리에서 발원된 남암천과 서의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 그리고 남의 황점 및 장전리에서 비롯된 목통천이 흘러 면 소재지 아래에서 합수하여 옥류천을 이루어 성주군 방면 동쪽으로 흐르고 이들 가천 양안에 좁은 들이 이루어져 있다.

무주∼대구간을 연결하는 30번 국도가 면을 동서로 지나고, 지례면 속수 앞 3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903번 지방도가 면을 남북으로 달리어 장전리에 이르고 이 두 도로가 면소재지에서 교차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불령산(수도산)에 천년 고찰인 청암사와 수도암이 있고 경치가 뛰어난 골짜기가 많아 관광지로서의 전망이 밝은 편이며, 면 전체가 고지대인 관계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길고 추운 편이다.

증산의 증(甑)은 시루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부항의 부(釜)와 무관하지가 않다. 그것은 부산- 대증(大甑)에서 가마와 시루가 같은 개념으로 통용됨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본디 성주쪽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계열로 보아 그렇다는 줄거리다.

황항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황항, 임평으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고, 1906년에 황정리의 일부를 편입하여 이름은 그대로 황항리라 하고 지례군 내증산면 관할로 옮겼다가 1914년에 황항과 임평이 통합되어 황항리라 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가 되었다. 증산면 북단 산간 오지에 있어 버스가 다니지 않는 마을로 면 소재지와는 6.5km 거리이며, 부항리에서 동북쪽으로 갈려 들어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남암천의 발원지이며 동은 성주군 금수면, 남은 황정리, 서는 부항리, 북은 지례면과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누루목ㆍ황항(黃項)
    • 본래 지례군내 증산면의 지역으로서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주위가 황토빛이므로 누루목이라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의역한 것이 황항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항리라 해서 김천군 증산면에 편입시켰다. 일제시만 해도 백석꾼이 두 집이나 있을 정도로 부촌이었다. 본 면의 면소가 있던 곳이다. 논산의 옛 이름이 연산 혹은 황산벌이었는데 여기서 논-누르-느리의 대응을 보이는 바, 황항의 경우도 그런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 또는 황(黃)-자가 들어 가는 마을의 위치는 대부분 가운데를 이르는 일이 많이 있으니 황항도 가운데를 이르지 않나 한다.
  • 인패이ㆍ임평(林坪)ㆍ인평
    • 황항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몹시 가물던 어느해 사촌간에 물싸움이 벌어져 살인을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때린 들이라 하여 인패이들이라 한 것이 오늘날 인패이ㆍ인팽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에 의하면 옛날 임씨가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고 논밭을 개간하여 살았다고 하여 임평이라 불리어진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부항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월도·한적·시동이라 불리던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 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위 3개 마을과 신기를 합하여 부항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가 되었으며, 병자년(1936년) 대홍수 때 신기에 살던 수재민이 이주하여 이전부락과 새마의 두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고 주막뜸이 추가 되었다.

증산면 북단 산간오지의 골짝에 산재하는 7개의 마을로 면 소재지에서 3∼4km 거리이다. 지례면 속수에서 가목재를 넘어 면소재지로 연결되는 6번 군도가 지난다. 동은 황항리, 서는 대덕면, 남은 황정리와 동안리, 북은 지례면과 접경한다. 증산의 증(甑)-이 가마부(釜)의 부항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항의 옛 이름이 대증(大甑)이니 여기서도 증-부의 대응성이 찾아진다. 흔히 방언에 시루를 시루가마라고도 이름은 이러한 뒷받침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월섬ㆍ월도(月島)
    • 부항리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마을로 산 위에 섬같이 생긴 마을이다. 마을 뒤에 달뜨기난당이란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정월 대보름 달맞이 놀이인 달집태우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달을 볼 수가 있고 연기가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달뜨기난당과 섬같이 생긴 모양에서 마을이름을 월섬이라 불렀고 한자로 월도라 쓰게 되었다고 한다.
  • 한적골ㆍ한적(閑寂)
    • 교통이 발달되기 이전 옛날 사람들의 생각으로 아늑하고 한적한 곳이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생각되던 때에 터를 잡은 곳이라 부항리에서 가장 살기 좋고 아늑한 곳이라고 하여 한적골·한적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새터ㆍ신기(新基)
    • 주막이란 마을이 생긴 다음에 생긴 마을이다. 약 200년 전에 새로 터를 잡아 생긴 곳이라는 뜻에서 신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감나무골ㆍ시동(洞)
    • 병자년 수해 때 새터에서 옮겨 살게되어 생긴 마을로 감나무가 많아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 이전불ㆍ이전부락(移轉部落)ㆍ용암
    • 병자년 수해로 새터에서 이전하여 살게된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15가구의 각성이 거주하고 있으며 높은 지대에 둘러싸인 관계로 공기가 맑으며 서로 도우는 아름다운 풍속과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 새마
    • 병자년 수해로 새터에서 다시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마라 불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월도·월계동으로 이름하려 했으나 통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 주막뜸ㆍ주막땀
    • 옛날 현대식 도로가 생기기 전에 해인사와 거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4월 초파일 경에는 길을 이을 정도로 길손이 많아 장사가 잘되는 주막이 있었는데 여기서 유래하여 언제부터인가 이 마을을 주막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동안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상동·하동·월포·조산이라 불리던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위 4개 마을을 통합하여 동안리라 개칭하고 김천군 증산면 관하가 되었다. 서쪽에는 험준한 고드름산 줄기가 있고 동에는 황항리에서 발원된 남암천이 남류하고 산촌치고는 들이 넓은편이다.

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2km 떨어진 거리인데 903번 지방도로 연결된다. 동은 황정리, 서는 대덕면, 남은 평촌리, 북은 부항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조산말·조산(造山)·금포(金浦)
    •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입구에 산처럼 생긴 작은 탑을 쌓은 이후에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조산·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산촌이라 의식이 풍부하지 못한 주민들이 부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금포라 즐겨 불렀다고 전한다.
  • 월포·월포리(月浦里)
    • 옛날 남암천과 목통천이 합류하는 곳에 큰보가 있었다고 전하며 그곳의 달구경이 좋다 하여 월포·월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황정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황정·봉산·고동이라 불리던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위 3개의 마을과 풍령이 통합되어 황정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하가 되었으며, 1936년 병자년 대홍수 뒤에 수재민이 모여서 신기마을을 새로 이루었다.

동은 월출산 줄기가 달리고 서로 갈수록 낮아진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야산지대에 산재하는 4개의 마을로 풍령을 제외한 면소재지에서 1∼2km 거리에 있다. 동은 성주군, 서는 동안리, 남은 유성 1·2리, 북은 황항리와 접경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원황정·황정(黃亭)
    • 옛날 경산이씨가 약 350년전에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동입구에 유림이 울창하여 그 밑에 정자를 지었다. 농토가 비옥하여 오곡이 풍성하였으며 봄·여름의 꾀꼬리 소리와 가을 빛이 좋다고 하여 황정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 봉산(鳳山)
    • 이 마을 입구에 약 580년쯤 되는 큰 느티나무가 있으며, 이 느티나무에 산새들이 울음소리가 특이하다는 뜻으로 봉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20여 가구가 사는데, 주로 인동장씨와 진양강씨이다.
  • 새뜸·신기
    • 병자년 홍수 때 수해를 만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고하여 생긴 이름이라 전한다.
  • 바람재·풍령(風嶺)
    • 천상봉 줄기에 위치하여 지대가 높고 바람이 거세다 하여 바람재·풍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평촌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평촌·장평·추령의 세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평촌·장평 ·추령이 통합하여 평촌리라 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에 들었다. 남·서·북의 삼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은 평야로 되어 있으며, 천년 고찰인 처암사가 있으며 면소재지와는 30번 국도로 1.5km 거리이다. 가랫재·청암사골·수도리의 세 골짜기에서 발원된 3개의 개천이 장평 남쪽에서 합류하여 대가천을 이룬다. 서는 대덕면, 남은 수도리, 북은 동안리와 산으로 접경하고, 동은 유성1리와 이어져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들마·평촌
    • 옛날 이곳에 이씨·한씨·박씨의 삼성이 합심하여 전답을 이루니, 들이 넓고 평평하여 대평이라 했는데, 이 들에 마을이 이루어졌으므로 들마·평촌이라 불렀다.
  • 장뜰·장평(壯坪)
    • 옥동에서 2.7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로 30여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 마을의 지형이 해주선형(解舟船形)이라 배를 매는 말뚝이 필요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장뜰·장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수도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수도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고,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수도리라 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가 되었다. 증산면 남서쪽 끝을 점하여 서쪽 수도산(1317m)에는 고찰 수도암이 있고 남에는 단지봉(1321m)이 있는 산간오지에 위치한 마을인데 면 소재지 와는 8km 거리이고 교통이 극히 불편하다. 해발 800m의 높은 지대로 여름철에도 개울물이 차다. 동은 금곡리와 황점리, 서와 남은 경남 거창군, 북은 평촌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수도·수도리(修道里)
    • 마을 뒷산인 수도산 중턱에 수도암이 있는데 이 암자는 신라의 도선국사가, 절터가 수도장 으로 적합하다 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뒷산도 본 이름은 선유봉이라 하였는데 국왕께 상주하여 수도산이라 고쳤다. 이곳은 첩첩산중으로 옛날부터 나라에 죄를 지었거나 또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 투쟁 의사들이 피신차 와서 전답을 이루고 살아 왔는데 수도사라는 절 이름을 따서 수도리라 하게 되었다 한다.
  • 내원(內院)
    •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내원사가 있었는데 이 절이 없어지자 이 절터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절이름을 따서 내원이라 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유성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옥동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옥동·유성 ·지소를 통합하여 유성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에 들게되었다. 1973년 유성, 지소가 분동해 나가고 옥동이 유성 1리가 되었다.

김천도심에서 32km 거리인 면소재지 마을로, 마을 뒤에 증산면을 상징하는 시루봉(증산)이 솟아 있다. 수도산과 황항리에서 다르게 발원된 대가천과 남암천이 마을에서 합류하여 옥류천을 이루어 동으로 흐르고 주위의 들이 넓다. 동은 유성 2리, 서는 평촌리, 남은 금곡리, 북은 황정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옥동·옥류동(玉流洞)·백천강·백천구(白川구)
    • 이곳은 증산면 사무소가 있는 곳으로서 매월 2일·7일로 5일장이 서는 곳이다. 옛날에는 쌍계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는데 이 사찰이 쇠퇴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6·25 때 공비로 말미암아 이 사찰이 완전 소실되자 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되고 이곳을 흐르는 맑은 물과 돌이 아름답다고 하여 백천구라 했다. 광해군 때 판서 정술선생이 놀러 왔다가 냇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흘러가는 것이 마치 옥이 굴러가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옥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 버들밭·원유성·유성(柳城)
    • 옛날 이곳은 냇가에 버들숲이 무성하였는데 350여년 전에 황씨라는 분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고 차츰 버들을 베어내고 그 곳을 농토로 개간하여 버들밭이라고 불려지다가 행정동명이 정해지면서 유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지소(紙所)·지촌
    • 유성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은 앞냇물이 맑고 수량이 많아 종이를 만들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한지를 생산하게 되어 청암사·쌍계사·수도사 등에 제공하다가 이 마을의 한지가 질이 좋으므로 조정에 바쳤다고 전해진다.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지촌·지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근래까지도 한지 생산을 계승하고 있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금곡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금곡·개정지·거물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었다.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금곡·개정·거물리 주변에 산재하는 작은 마을을 통합하여 금곡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하가 되었다. 동과 서는 높은 산지로 되어 있고 리의 중간부에 목통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냇가에 좁은 들이 형성되고 이 들을 따라 903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원금곡에서 면소재지까지는 북으로 3.1km이다. 동은 성주군, 서는 수도리, 남은 장전리와 황점리, 북은 유성1·2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구금곡(舊金谷)
    •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안동권씨가 이곳에 피란을 와서 이룬 마을이다. 금곡이란 지명의 유래는 옛날 이 고을에 사금이 많이 나와서 금광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금을 캐는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라 한다.
  • 안터·내기(內基)
    • 병자년 대홍수 때 금곡이 물바다가 되어 전답과 가옥이 모두 떠내려가고 사람이 7명이나 죽어 안터밭에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된 후부터 밭이름인 안터가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거무리·거물리(巨勿里)
    • 옛날 이 마을 앞에 거무리(거머리)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접근을 못했으며 어떤 때는 민가에까지 침범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못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거머리가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거무리라 한 것이 한자음으로 거물리라 하였다 한다. 거북을 지역 방언에 따라서는 거미-거무라고도 이르는 바, 거머리의 원의미는 거북을 드러내는 것으로 거북을 농경지대의 토템으로 섬기던 신앙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신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것이다.
  • 주막뜸
    • 옛날에 말을 타고 김천에서 합천 해인사나 거창으로 가는 통로인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주막이라 하였다고 한다.
  • 개정지·가정지(柯亭地)·개정
    • 거물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입구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개정지·가정지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장전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했던 장전·청천·송계의 세 마을을 일렀다.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에 귀속되고,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청천·송계·선무기·마고실과 그 주변의 작은 마을을 통합하여 장전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가 되었다. 증산면의 남동 끝에 위치하여 동남북을 에워싼 높은 산이 서로 갈수록 낮아져 마을의 서쪽은 넓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장전리와 황점리에서 발원된 목통천의 지류가 이 계곡을 따라 북류하고, 그의 양안에 꽤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면 소재지와는 903번 지방도로 6km 거리이며, 동은 성주군, 남은 거창군, 북은 금곡리와 접경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청천·마고실하면 이보다 더한 산촌이 다른 곳에도 있으나 김천지역에서는 벽지의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다. 마고실은 마지막골이라는 뜻으로 막다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청천이·청천(晴川)
    • 봉답 서쪽 맑은 냇가에 있는 부락으로 마을 양쪽에 푸르고 맑은 냇물이 계속 흐르고 있어 청천·청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마구실·마고실(麻古室)
    • 이 마을은 성주로 가는 통로로서 예로부터 말을 많이 길렀던 마고실이 있었다 하여 마을이름까지 마구실·마고실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유래에 의하면 옛날에 마고할머니가 성만 재에서 쉬어 갔다고하여 마고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 서무터·선무기(善武基)
    • 100여년 전 김천지역의 천주교 발상지로서 천주교 신자(안주원)이 병오사옥(1866)때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착함을 전하는 곳이라고 하여 선무기라 하였으며, 훗날 서무터로 변경되어 부르게 되었고 8가구의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다.
  • 봉답(鳳畓)
    • 주민들의 대부분이 밭을 일구어 살아가며 논이 적어서 논을 봉처럼 귀하게 받들었다는 뜻에서 봉답이라 이름하였다. 10여 가구의 각성이 소농으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황점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증산면에 속한 황점·초동·문례·죽항이라 불리던 4개 마을로 1895년에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내증산면에 귀속되었고, 1906년에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황점·초동·문례·죽항과 석장을 통합하여 황점리라 개칭하여 김천군 증산면 관내가 되었다.

증산면의 남쪽끝인 산간오지의 작은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7.5km 거리이다. 동은 형제봉 (1022m), 서는 단지봉(1321m), 북은 새목양지(984m)가 둘러싸고, 북동쪽으로 골짜기가 트여 목통천의 상류가 흐르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동은 장전리, 서는 수도리, 북은 금곡리, 남은 거창군과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원황점(元黃店)
    • 원래 황(璜)을 구운 황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황점이라 한다. 김해김씨 중간시조가 유황을 구워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단초였다. 원래 마을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병자년 수해때 유실되어 아랫쪽으로 옮겨졌다.
  • 대목·죽항(竹項)
    • 원항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고, 대나무가 무성하므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8가구의 각성이 거주하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담배·약초 등이 성하다.
  • 초막골·초동(草洞)
    • 대목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에는 풀이 많아서 풀로 막을 짓고 농사일을 하였다고 하여 초막골·초동이라 한다.
  • 돌마당·석장(石場)
    • 옛날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집터가 될 만한 곳은 모두 돌이 많아 큰 애로를 겪었다고 하여서 마을이름을 석장이라 지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곳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돌이 많다.
  • 문이·문례(文禮)
    • 박씨가 처음 이 마을에 이주하여 살면서 글을 가르치고 예를 숭상하므로 이웃 주민들이 이를 앙모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홈페이지 서비스 향상을 위해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페이지의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