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부항면
유촌 1리 서북쪽에 있는 비룡봉은 용이 승천했다는 성스런 산으로 이 산을 중심으로 명당이 많다 하여 묘가 유달리 많다.
뱃들 마을 입구에 마치 문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 상두대에 권세를 가진 병사 가족이 살았는데, 이 병사가 불교를 매우 탄압하였다. 이 때 고승이 도사로 변장해 나타나 병사 가족에게 석문 바위를 깨뜨리면 가정이 번창한다고 속여 석문을 깨뜨리게 하니 바위 속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고 병사 가족도 사라지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부항면 초대 면장 김훈상(金薰相)이 재임시 3번 국도(김천 ~ 거창)가 부항면을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는데 그를 중심한 면민들이 신작로는 미풍양속을 해친다 하여 반대하므로 지금과 같이 대덕면을 거치도록 변경되었다 한다.
황악산 직지사 아래 마을에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호랑이 잡는 일을 계속해 왔는데, 하루는 함정을 파고 덫을 놓아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뒤에 아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땅에 넘어지더니 한참 있다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웬 사람이 나타나 내 등을 심히 매질하면서 '왜 내 말을 죽였나' 하더라." 고 말하였다. 아들이 매 맞았다는 곳이 자꾸 헐어 터지고, 그 아들은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 장생은 그 후부터는 다시는 함정을 파서 호랑이 잡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월곡에 살았던 성태령(成泰領)이란 사람의 집에 백범 김구가 일경을 죽이고 3개월간 은신해 있었다 한다.
하대리 중평은 원래 뱃들(舟坪)인데, 마을 형상이 풍수지리설로 바다에 뜬 배와 같다 하고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마을 가운데에 돛대를 세워 놓았다 한다.
옛날 하대와 중평이 싸움을 일삼아 왔기에 가운데에 성을 쌓아 경계선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성을 성재라 한다.
대야리 남쪽 골짜기에 몇집 있었던 마을이다. 구한말 이곳에 살던 이용강(李龍岡. 경상도관찰사를 파직당하고 이곳에 은거)이 주택을 짓고 살면서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횡포를 부렸는데, 항일독립군 김산장 의군(金山杖 義軍)에게는 군량미 80석을 순순히 내놓았다 한다.
두산리 말미마을 남쪽 들인데 옛날 9형제가 살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구남천 유원지로 여름이면 유흥객이 모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