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동
평화동은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김천면 (金山郡 金泉面)에 속했던 갈마동의 자연 마을과 대여섯 집이 모여 살던 서낭대이가 있었을 뿐이다.
갈마동은 지금의 김천역 북쪽의 80번지라 부르는 마을 앞이며, 서낭대에는 서부 초등학교 진입로 갈림길 언덕기로 그곳에 서낭당이 있었고 서낭당 동쪽 도로변에 대여섯 집이 있었다.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 김천역 앞에는 일본인들이 요지를 잡아 철도 승객들을 상대로 음식점 등 기재를 열어 급속도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인 일본인회를 1906년 조직하고 그 단체에서 1909년에 김천 역전지역을 일본식 동명을 지어 야모토마찌라 부르다가 1914년에 지방행정 구역 개편시 야마토마찌 구역을 지금의 평화동 구역과 같이 정하고 정식 동명으로 확정되어 일제시대까지 사용되어 왔었다.
광복 후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평화동(平和洞)이라 고치고 62년에 1,2동으로 분동했다가 83년에 한동으로 통합하였다.
평화동
평화동은 본래 김산군 김천면에 속하고 있던 지역으로서 1914년 갈마동과 인근 지역을 포함하여 대화정이 되어 김천군 김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평화동으로 개칭되어 오다가 1949년 김천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천시 평화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평화동내에 서낭댕이·후생주택 등으로 부르는 곳이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서낭댕이
고성산의 지맥이 현 평화동 김천서부초등학교 진입로의 입구와 구경부선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김천서부초등학교 진입로 입구 부근에 높은 고개를 이루고 있었으며 오가는 길손들이 돌을 던져 행운을 비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 성황당의 좌우에 5, 6 가구가 있었는데 이 마을을 서낭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도시형성으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성황에서 소리가 바뀌어 성황-서낭이 굳어진 것이다.
후생주택
6·25 동란 때 폭격으로 김천 시가지가 완전히 파괴되어 수복 후에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미군 원조 자금으로 50동에 이르는 주택이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이 마을을 후생주택이라 부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갈마동
김천역의 서북쪽에 있으며 공용자동차 정류소 북쪽이다. 옛적에는 말의 거세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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