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지금의 봉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김산현에 속한 고장으로서 직지사에 봉납하는 산물을 생산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김산군 파며면 또는 파미면(巴彌面)으로 상리. 중리. 상지리. 하지 리. 입석. 천포. 신립 등 7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1914년에 충북 황간군 남면의 신계. 도산. 남전. 복산. 상마전. 하마전. 태평. 봉산. 사점. 하리. 하중리. 상리. 상중리. 금화. 신기. 신촌. 고도암. 가성을 편입하여 봉산면이라 하고 17동을 관장했다.
1973년에는 복전동을 대항면에 편출하였다. 군수 정유번(鄭維藩)의 차자 형승(亨升)이 살 던 곳은 고월천리(古月川里), 노비 전순기(全舜起)의 효자 정려문(旌閭門)이 있는 곳이 효자동(孝子洞)이라 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으로 김천 시내와 어모면, 서로 충북 영동군 매곡면, 남으로 대향면, 북으로 영동군 추풍령면과 인접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 고속도로, 국도가 면의 중앙으로 지나가고 김천 시내에서부터 7km지점에 위치하여 벼와 포도 재배의 적지로서 403ha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충북 접경 지점에 추풍령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육로 교통이 집중되어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다. 산지가 전체 면적의63%이며, 산세는 비교적 험준하여 700m 이상의 준령이 3개소나 되며 낙동강 지류인 직지천이 감천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
신리
조선시대에는 마을 앞에 못이 있어 상지동이라 하고 김산군 파며면 또는 파미면(巴彌面)에 속했다. 못이 없어지고는 아랫마을을 하촌이라 했다. 1914년에 신동이라 하고 신설된 봉산면 관하에 들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바꾸었다. 파미는 바미 - 뱀에서 유래한 것으로 뱀신앙 곧 용신앙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파(巴)는 뱀(巳)에서 비롯한 연원을 갖는다.
신리. 예지 1리는 봉계라는 큰 한 마을로 군내에서 으뜸가는 반촌으로 예로부터 현재까지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신리는 봉계 들머리에 있고 초등학교가 있다. 동쪽은 산이 막아 김천시 문당동과 인접하고 서쪽은 예지 1리의 송정이 있다. 남쪽은 장사례들 가까이에 경부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가고 있다. 북쪽은 예지 1리에 인접하며 극락선(498m)이 솟아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송 정(松亭)
- 1452년 홍문관 교리였던 영일정씨가 이곳의 송림 속에 정자를 세우고 살았다 하여 송정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 정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한다.
- ② 하촌. 신동(信洞)
- 원래 김산군 파며면 봉계 고을 중에서 아래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촌으로 불러 오다가 고려때 부원군의 아들 사신의 끝자를 따서 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인의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파며면에 속한 중리였는데, 중리. 하리. 하촌. 송정 4개 마을을 통칭하여 봉계(鳳溪)라 하였다. 1914년 중리와 상리를 합하여 인의동이라 하고 봉산면에 속하였다가, 1971년 중리를 인의 1,2동으로 나누어 마을을 인동 1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여 인의 1리라 부르게 되었다.
김천시내에서 4.6km 떨어진 마을로서 동으로는 김천시 삼락동과 접하고 서로는 본면 예지 2리, 남으로는 봉계천을 따라 예지 2리, 북으로는 극락선을 경계로 인의 2리와 인접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땅은 사양토로 벼와 포도 재배에 알맞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중리. 인의 1동
- 김산군 파며면 봉계 고을 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해 중리라 칭해 오다가, 고려 공민왕때 부성부원군의 아들 사인. 사의의 끝자를 따서 인의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1988년 1동으로 분동했다. 중리라 부르게 된 것은 봉계를 분리하여 상리. 중리. 하리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 ② 곧으네골. 상리. 직동(直洞)
- 조선 숙종 때 통훈대부 정만용의 둘째 아들 파계 량수를 김산군 파미면 봉계 마을의 가장 윗마을로 분가시킬 때 곧게 올라 가서 터전을 닦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③ 새터. 신기(新基) - 조선 중엽부터 성씨가 먼저 정착했는데,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토리 수집과 포도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예지리
예지리는 본디 봉계동으로 하촌(신리. 예지. 인리)으로 칭하다가 고려 때(1373년) 상촌(인의 2동)으로 분리되었고, 그 후 1914년 김천군 봉산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봉계동이 신동, 인의 1. 2동으로 나누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봉계동은 전통적인 반촌으로 일컬어지며, 마을의 이름도 인의. 예지로 요약되며, 성씨의 분포도 영일정씨의 집성부락이라고 할 만하다. 마을 뒷산으로 삼락동(거문들)과 경계하고, 마을 앞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인의 2리 어모면과 경계를 이루 고 있다.
- ① 밤리. 율리(栗里)
- 장살들 가운데 새터 마을이 있었는데, 병자년 집중 호우 때 자취도 없이 매몰 되었으며, 새터 마을에서 북동쪽 2km 지점인 밤티 모퉁이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 이곳은 밤나무 숲이 뒷산을 무성하게 싸고 있었기 때문에 율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② 선돌. 입석(立石)
- 예지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마을앞에 바위 조각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한 개의 바위였다. 마을 입구 길 옆에 깎아 세운 돌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황간과 김산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안쪽은 황간 땅이고 바깥 쪽은 김산 땅임을 표시한 것이다.
- ③ 안선돌. 내입석(內立石)
- 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km 저점이고 입석마을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창녕조씨. 진주강씨. 연안이씨 등 37가구가 살고 있다.
- 그리고, 이 마을은 산지를 개간하여 밭을 조성해서 포도. 과수면적이 비교적 넓어 농가소득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초지가 많아서 농우사육 농가가 많은 마을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덕천리
조선시대 중기에는 영동군 황간면에 속한 용포리이고 말기에는 신계라 하고 일제시대부터는 용배라 했다. 1906년에 김천군 파미면에 편입되고 1914년에 남전. 도산과 통합하여 덕천동이라 하고 김천군 봉산면에 이속되었다.
1971년에 용배를 덕천 1동으로 남전. 도산을 덕천 2동으로 분동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변경했다. 용배 서쪽에 있던 천포마을은 1920년경에 없어졌다고 한다. 가막산을 뒤로 하고 남향으로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표본이며, 마을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태화천이 맑게 흐르고 마을 왼쪽에서 남으로 기운차게 뻗어 나아간 경부 고속도로와 태화천 사이에 펼쳐진 용배들에는 포도밭이 그림같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농지가 기름져서 벼와 포도 농사에 적지이며 그 밖에 과수 재배와 특작물 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샘재. 신계. 용배(龍背)
- 1452년경 경주이씨 한 선비가 이 곳에 들러 쉬어가면서 지세를 살펴보니 용의 등과 같다 하여 용배라 하게 되었다 하며, 용의 등이 되어서 심을 파도 물이 날 수 없고 만일 물이 나면 뱀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다.
- 그래서 이 마을에는 샘이 귀하여 흘러내리는 자연수를 이용, 1974년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여 급수하고 있다.
- ② 도산(都山)
- 덕천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주로 창녕조씨가 살고 있으며 이 마을 개척 당시 동제를 올리는 작은 산이 있다 하여 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태화리
태화 1리 봉명은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의 2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충북 황간군 황남면에 속하여 오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으로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경북 김천군 봉산면 태화동으로 고쳐 불렀다. 1988년 5월 1일 금릉군 조례 제 1021호에 의거 동을 리로 개칭하게 된다.
4번 국도가 마을 중앙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마을 중앙에 직지천 상류가 남으로 흐르고 그 양안에 평야가 펼쳐 있다. 국도변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마을 전후로 산세가 좋고 송림이 울창하며 마을 중앙으로 직지천 상류인 말고 깨끗한 청수가 남으로 흐르며 냇가에 나무의 수령이 약 150년 된 땅버들 숲이 우거져 자연 경관이 빼어나다. 1994년 5월 봉산면 내에서 제일 먼저 관광농원으로 입지 선정이 되어 각종 사업 계획의 추진으로 복지 마을 건설을 향한 청사진이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가매기. 가막리. 봉명(鳳鳴)
- 옛날 이곳에 가막사(可幕寺)란 절이 있어서 가막리라 전해내려 오며 지금도 절터에 석탑이 남아 있다. 봉명이란 명칭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박완의 증조부가 경치가 아름다워 새들이 노래함을 뜻하는 봉명이란 두 글자를 돌에 새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유래된 이름이다.
- ② 태피. 태평(太平)
- 옛날 이곳을 지나던 이름없는 한 중이 개방이 고개를 넘을 때 고개 위에서 쉬며 바라보니 마을이 참으로 평화롭게 보여 과연 태평하구나라고 한 마디 한 것이 유래가 되어 태평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 ③ 평촌. 하리마. 하리(下里)
- 옛날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이 마을 근처에 있는 개방이재를 넘나들었는데, 이 재에 도적이 많아 과거 보러 가는 이들이 금품을 빼앗겼으나 이 마을에만 오면 평화스러웠다고 해서 날이 저물면 이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 갔다. 이 고을의 5개 부락 중 가장 아래 있는 부락이라 하여 하리 또는 하리마라 불렀다 한다.
- ④ 창말. 창촌(倉村)
- 옛날 이곳에 건평 약 50평의 창고를 지어서 군사들의 군량미를 보관하고 달구지로 운반해 주었다 하며, 창고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창말 또는 창촌(倉村)이라 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상금리
조선시대에는 영동군 황간면에 속한 상리와 중리(상중리)였는데 1906년 김천군 파미면에 편입되고 1914년 금화(金化). 사점(사기점리)를 통합하여 상금동이라 하고 봉산면 소관으로 개 편되었다.
의성김씨 일가가 동리를 창설하여 지매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 50m 저점에 상금 천이 남으로 흐르고 마을 앞뒤로 포도밭이 많은 평야가 펼쳐 있고, 상금천 1km지점을 경계 로 동북쪽으로 예지 2리 안선돌과 접하고, 서쪽으로 신암 1리와 남쪽은 태화 3리 창촌, 북쪽 은 추풍령 작점리와 접경하고 있으며, 상금 2리 점리와 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상리(上里)
- 옛날부터 창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고을의 가장 위쪽에 있다고 상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최초의 이주자는 홍씨였으나 지금은 한 집도 없고 전주이씨. 의성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창말이라 함은 나라의 세곡을 받아 관리하여 두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을 이른다. 곳곳에 창말이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강가에 있으면 강창이 됨은 물론이다.
- ② 상중리. 중리(中里)
- 옛날부터 창촌. 중리. 상리를 합쳐서 창말 고을이라고 했는데, 고을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리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경주이씨가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았다고도 하고 전주이씨가 먼저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 ③ 금화(金化). 사기점. 점리(店里)
- 옛날부터 사기 그릇을 구워 오던 마을이란 뜻에서 사기점 혹은 점리로 불려 왔으나 그 뒤 마을이 없어지고 사기 그릇을 구웠던 흔적만 남아 있고, 지금은 그 곳으로부터 약 2km 밑으로 내려온 야산 지대에 새로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옛 사기점터에서는 지금도 사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암리
조선시대에는 영동군 황남면에 속한 고도암. 조삼동(신촌)이었는데, 1906년 김천군 파미면에 편입되고, 1914년에 가성. 신기를 함께 통합하여 신암동이라 하고, 김천군 봉산면 관내로 개편했다. 1917년에는 고도암. 신촌을 신암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는 동을 리로 바꾸었다.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야산지대에 있는 두 마을로 학교와 간이역이 있는 경부선 철도와 4번 국도 사이에 있고, 고도암은 국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철도변 에 있다. 남쪽은 태화리이고 서쪽은 충북 매곡면에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새마을.신촌. 조삼동(鳥三洞)
- 옛날에는 현 위치에서 북쪽 500m 저점에 조삼동 부락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산사태로 마을이 파묻혀 이곳으로 이주, 새로 이룬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 ② 고대미. 고도암(高道岩)
- 조선 중엽에 김시창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뒷산에 높이 10m나 되는 큰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고도암이라 했다 한다.
- ③ 가재. 가성(柯城)
- 마을 뒤의 가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가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가성산 중턱에 옛 성터가 있다.
- ④ 신기(新基)
- 옛날에는 서낭당이라는 부락으로 인가가 약간 있었다는데 경부선 철도 개설로 마을이 없어지고 일제 때 근처에 새로 마을이 조성되었다 하여 신기라 불리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광천리
광천 1리는 돌목(돈목). 대막골(죽막). 감나무골(시목). 소래실(송라)의 네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북도 황간군 황남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에 경상북도 김산군에 통합하여 김천군 봉산면 광천동이라 불러 왔다.
1592년 임진왜란 직후에 광주이씨 3세대와 청주한씨 2세대가 처음 돈목마을에 이주해 왔고, 해주오씨 1세대가 송라 마을에, 영산김씨 1세대가 돈목에 정착하였다.
정유재란 이후 1597년 무렵에 충주박씨 1세대와 전주이씨, 경주김씨 3세대가 죽막마을에 들어왔고, 같은 해 파평윤씨 2세대와 은진송씨 1세대가 시목 마을에 정착한 것이 마을 발생의 기원이다. 죽막과 시목 마을 오른편으로는 4번국도가, 그리고 서쪽으로는 경부고속 도로와 철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므로, 평야지가 없고, 농지가 귀한 곳이며, 분수령인 추풍령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앞으로 세천이 되어 직지천에 이르며 낙동강 지류의 뿌리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의 서북쪽으로 해발 700m 높이의 선계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산을 봉화산이라 했다. 북으로는 해발 230m인 추풍령과 접경해 있고 접경지점이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지점으로 추풍령 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영동군 매곡면과 인접해있고 남으로는 700m 지점에 신암동 신기마을과 이웃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감나무골. 시목(枾木)
- 광천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중엽에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윤. 송. 손씨 등 각성이 모여 살고 있다.
- ② 주막거리. 대막골. 죽막(竹幕)
- 약 100년 전에는 돈목동 입구와 서울 가는 길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 하여 두세집이 살고 있었다 하나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국도가 확장되자 새로 마을이 이루어졌는데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막골. 죽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임진왜란 때에 추풍령 전투에 대비하여 이곳에 작전계획을 짠 곳이다.
- ③ 곤 천(坤川)
- 고려 말까지는 마을 앞에 건천내가 있어 건천(乾川)이라 하였으나, 그 후 음양오행설에 의해 조선시대 황간군 백호촌장 손정만이 곤천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손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 ④ 니리골. 너리골. 광동(廣洞)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당나라 군사가 이곳으로 내려갔기에 니리골이라 불렀다 하며, 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들이 골짜기를 따라 넓고 길쭉하게 펼쳐져 있어 너리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마을은 처음 조선 중엽에 양천허씨가 개척했으나 그 후 곽씨. 황씨가 들어와 살았고 지금은 안동김씨들이 주로 살고 있다.
- ⑤ 당마루
- 당마루 고개와 추풍령 고개가 인접하여 있는 마을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이곳에 당나라 군사가 쉬어 갔다 하여 당마루라 불렀다 한다.
- 지명 분포로 보아 당 - 계열의 마을은 거의가 성황당집이 있던 곳을 이르는 일이 많은데 이곳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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