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조마면

이 불상이 방치된 골짜기를 탑골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밭을 일구다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돌 하나에 불상과 광배가 새겨졌고 머리는 별석으로 새겨 조립하도록했으나 없어졌다. 전면에는 바른 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서 보병을 잡았다. 여래상인지 보살상인지 확연치 않으나 겉옷의 광배는 연꽃문을 새긴 두광과 불꽃문을 새긴 신광으로 구분되고, 뒷면은 주형의 평편한 광배로 조각했다. 조각 표현과 독립불상인 점으로 보아 여래상으로 추정되며 1996년에 보호각을 신축하였다.

자동서원은 남와, 강설, 기재 강여호 두 선생이 청환 요직을 거쳐 책난을 하다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스승을 쫓아 학문을 강해서 덕을 기르고 도를 닦아서 문행과 훈업이 빛나니 뒷 사람이 그 풍속을 우러러 보고 그 덕을 사모해서 숭봉하고자 하는 이가 많기에 도남서원 원장 김기찬, 사양서원 원장 이동필, 병산서원 원장 도유사 이제, 매림서원 원장 박민국, 낙봉서원 원장 김태온, 동갈서원 원장 장수훈등 555명의 영남내의 서원과 유림의 제현이 1804년(순조 4) 12월 6일부터 1806년 (순조 6년) 9월 3일에 걸쳐 발의합모하고 연자조력하여 유전을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한지 5년뒤인 1811년(순조 11년)에 준공하여 강당을 자동서원이라하고 사우를 상의사라고 남화, 기개 두 선생을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 5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7년 중수 복원하고 학암 강석구, 호은 강이하를 추향하였다. 남와 강설은 진주 강씨 고려 병부상서 은렬공 민첨의 14세 손이요. 김천 찰방 강부의 손자로써 충남 회덕에서 출생, 1612년 (광해 4년)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기호지방 선비들의 의병장으로 추대 받은 바 있다.
1628년 입김산하여 지금의 구성 광명리(기를)에 거처를 정하고 정한강 문하에서 공부하고 수신제가하고 도의교우하며, 사친이효하고, 겸공으로 교자손하였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를 1634년 (인조12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향내 유림의 협조를 얻어 재건하고, 유지를 받들어 아들 강여구가 동.서재와 묘문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