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감천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감천면

지명유래

조선시대에는 성주목에 속한 신곡면(엽실방) 무안동(외안, 기산, 무릉, 신안, 통정, 대동, 삼거리). 용호동(복룡, 매화, 입암, 복호, 하평, 상평). 도평동(소룡, 후평, 평산, 도촌). 광기동(기동, 잡화, 광암, 등당, 내동, 사촌)을 관할하였고, 1906년에 신곡면이 김산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총독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고가대면의 양천동, 금송동(송곡, 상송, 하송, 원동, 대방, 이화). 전동은 광기동으로, 지좌동(군내면 마좌산리)과 조마남면의 신평리 등을 개편 통합하여 감천면을 신설하고 그 관내에 편입했다.

1928년에 감천면 지좌동은 김천특별면에 편입했고, 1983년에는 양천동이 김천시에 편입됨으로써 5개 법정동이 되었다. 이에 앞서 1949년에 행정 구역 개편시 2, 3동으로 분동되어 13개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김천 지역의 중앙 지점 동쪽에 위치하고 김천 시가지 남쪽에 접하며 김천시내에서 면 소재지까지는 8km 떨어져 있다. 동으로는 농소면과 접하고 남으로는 조마면 일부(신왕리)와 접하며, 서쪽은 북류하는 남천과 감천을 경계로 조마면(삼산리, 장암리, 신안리)과 양천동과 접하며 북으로 지좌동과 접한다.

시내에서 가장 작은 면으로 남으로는 조마면 일부와 경계를 이룬 고당산(579m)과 동으로는 고당산 줄기의 산 정상을 경계로 농소면과 접하면서 산악지대와 구릉지대를 형성했고, 서쪽은 감천유역에 발달한 평야 곧 금송평야. 도평평야. 언고개들. 남천유역에 진만리들. 개양지들 등이 곡창을 이루고 구릉지대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어 경작하고 있어 매우 부유한 편이다.

김천의 젖줄이라고 할 감천을 고장의 이름으로 할 정도이고 보면 그 역사가 자못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천은 중앙천이요, 기원적으로는 거북신 곧 물신과 땅신을 섬기는 믿음에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김천 지역 농업생산의 주도적인 구실을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997번 지방도로가 남북으로 뻗어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 하다.

용호리

복륭, 매화. 입암은 성주목 신곡면(엽실방)에 속하였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령에 의하여 1914년 4월 행정구역을 대폭 통합함에 따라 김천군 감천면 용호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49년 8월 행정구역 개편시 금릉군 감천면 용호 1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88년에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감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진 어름에 있는 복륭. 매화. 입암 마을로 이루어 진다. 복륭과 매화는 997번 지방도로변에, 입암은 도로에서 서쪽으로 들어가 조마면 삼산리와 경계를 이룬 남천(북류)유역 평야 구릉에, 동쪽은 구릉과 산으로 무안 1리(고당산)와 인접하고 남쪽은 용호 2리에 이어진다. 서쪽은 진만리들을 거쳐 남천을 경계로 조마면 삼산리와 접하고, 북쪽은 무안천을 경계로 도평 2리와 인접하고 997번 지방 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목골. 복룡(伏龍)
    • 조선시대에 경주최씨가 입향하였는네 용이 엎드려 있는 지형이라고 마을 이름을 복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연화. 화심.매화(梅花)
    • 조선시대에 김녕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 부근에 많은 매화가 만발하여 절경을 이룬 곳이라고 매화리라 부르게 되었다.
  • 선바우.입암(立岩)
    • 옛날 마을 앞에 높이 2m, 둘레 3m의 큰 바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남평인 문응서가 약목에서 이주해 와서 부락을 만들고 입암이라 하였다. 그 후 병자년 수해 때 바위가 넘어지자 마을에 흉사가 잦았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다시 시멘트로 바위를 세웠다.
  • 복호(伏虎)
    • 조선시대에 성주인 이수정이 고령에서 이거하여 마을 뒷산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세라고하여 복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굼뜸. 하평(下平)
    • 마을 밑에 위치한다 하여 하평이라고 부른다. 면 소재지로부터 8km 떨어진 조마면과 인접 한 부락으로 누에고치를 많이 생산했으나 지금은 고등소채를 경작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무안리

외안. 기산. 삼거리로 이루어지는 무안 1리는 조선시대에 성주목 신곡면(엽실방)에 속한 곳 인데, 1906년 신곡면이 김산군에 이속되었다. 1914년 총독령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통합시켜 김천군 감천면 무안동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8월 행정 구역 개편시 금릉군 감천면 무안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진 산간 지대에 기산. 외안. 삼거리 세 마을로 동쪽은 무안 2리와 접하고, 남쪽은 고당산이 가로 막아 신왕 2리(조마면)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용호리와 접하고 북쪽은 무안천을 경계로 무안 3리와 인접하고 있다. 그리고 325호선 도로가 동서로 통하고 그 남쪽 산골짜기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재실마. 외이. 외안(外安)
    • 1765년 해주인 오태원이 성주 가천에서 이주하여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며 가천의 밖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외안이라고 불렀다. 40여가구 중 오씨. 최씨가 많으며 특산물로 사과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 터골. 기산(箕山)
    • 조선시대에 경주최씨가 대대로 산 곳으로 뒷산 형국이 기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기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사과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 삼거리(三巨里)
    • 광복 후에 형성된 마을로서 난민 정착사업으로 하천부지개발을 위해 생긴 부락이며 세갈래길이 있는 지점이란 뜻에서 삼거리가 되었다. 마을 주변은 사과나무밭으로 둘러 싸여 있다.
  • 섭반어. 무릉(武陵)
    • 1939년 동래인 정한필이 칠곡에서 이주하여 이곳이 무릉도원과 같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무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새실마. 재실마. 신안(新安)
    • 조선시대 말엽에 전주이씨가 이곳에서 편히 살 수 있는 새 터전을 마련했다고 하여 신안이라 했으며, 그 뒤 해주오씨가 이곳에 재실을 세웠기에 일명 재실이라고 부른다.
  • 통샘말. 통정(桶井)
    • 외안 동쪽에 있는 마을로 통샘이 있었다고 통정이라고 부른다. 이 샘에서 솟아 나오는 물을 마시면 장수를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3가구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 큰골. 대동(大洞)
    • 조선시대에 군위사람 방광로란 사람이 성주 용암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크다고 대동이라 하였다. 40가구 중 손씨. 송씨가 많이 살며 과수원이 많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도평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신곡면에 속한 소룡인데 1906년 김산군 신곡면으로 편입되고,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통합시 신곡면 후평. 평산. 도촌과 조마 남면의 신평을 통합하여 도평동이라 하고 신설된 감천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행정구역 개편시 소룡을 도평 1동으로 분등하고, 1988년에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소룡리는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0.5km 떨어진 평야지대이며, 997번 도로변과 구릉지 골짜기에 걸쳐 5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동쪽은 산으로 무안 3리와 광기 2리에 접하고 서쪽은 넓은 평야를 건너 감천을 경계로 조마면 신안리와 접하고 남쪽 도평 2리 북쪽은 광기 1리와 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소룡골. 시영골. 소룡(沼龍)
    •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 이곳에 소가 있었다. 이 소에서 용이 등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소룡골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곳에 이언의가 병자호란때 출전했다가 전사했는데 그의 말이 혼자서 되돌아 왔으나 먹지 않고 주인의 뒤를 따라 굶어 죽었고 그 말의 의마비가 있다.
  • 평산리(平山里)
    • 1490년대 죽산인 박수간이 칠곡현감을 지내다가 그만 두고 이곳에 입주하였는데 넓은 들판을 앞에 둔 산록이라 하여 평산리라 하였다.
  • 후평(厚坪)
    • 경주인 최하일이 섬천 삼계에서 입주하여 1560년 진사에 오르자 평산리보다 더 두터운 곳이라 하여 후평이라고 하였다.
  • 도고리. 도촌(道村)
    • 병자년 수해로 인하여 마을이 매몰되고 산을 피해 도로변에 마을을 이전시킴에 따라 도촌이라 불리어졌다. 10여 가구가 사는데 김씨가 많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광기리

성주목 신곡면에 속한 기동과 접화리는 1906년 김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에 총독부령에 의한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김천군 감천면 광기동이 되었다. 1949년 8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릉군 감천면 광기 1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8년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접화리는 1938년 10월 1일 면사무소가 전동에서 이전된 후 각 기관이 신설되어,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광기 1리는 김천시에서 6.9km 떨어진 구릉지대와 평야지대에 속한 곳인데, 997번 지방도 로변에 면사무소. 우체국. 감천농업협동조합 감천분소. 감천초등학교 등이 들어서고, 서쪽은 천산기슭에 기동 마을이 이루어졌다. 동쪽은 야산과 구릉지로 광기 2리와 접하고 남쪽은 학교 뒤 원장을 경계로 도평 1리와 접하고, 서쪽은 은천산 정상을 경계로 도평 1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구만리들 중간을 경계로 광기 3리와 접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997번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기동(基洞)
    • 조선시대에 성주이씨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주변의 지형이 소쿠리에 밀개로 끌어 담는 모양이라 마을의 자리로서는 기본이 된다고 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더푸리. 접화리(蝶花里)
    • 옛날에 남녀가 부모의 눈을 속여 정을 통한다는 곳으로, 나비가 꽃을 찾는 곳이라하여 접화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더푸리란 말은 정사를 뜻함이다. 현재 감천면사무소와 감천파출소. 감천농협. 감천초등학교. 감천우체국이 이곳에 있다.
  • 둥디이. 큰동네. 등당(登堂)
    •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등을 달아 놓은 모양과 같다고 등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40여 가구가 살며 주로 이씨가 많다.
  • 뒷골. 광암(光岩)
    •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그 바위가 빛을 냈다는 전설이 있어 광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특산물로 사과와 포도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
  • 안마을. 내동(內洞)
    • 1864년 밀양인 박세웅이란 사람이 선산 해평에서 이주하여 고을 안이라고 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10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산물은 사과이다.
  • 전동(田洞)
    • 본 면소재지 접화리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옛날부터 밭이 많았다고 전동이라고 부른다. 27가구 중 최씨가 주로 살며 과수원이 많다.
  • 배다리. 사촌(沙村)
    • 옛날 감천을 나룻배로 건너 다닐 때 이곳에서 배를 탔다고 하여 배다리라고도 한다. 현재 세 가구가 살며 모두 상점을 하고 있다. 또한 모래가 많이 쌓여 사촌으로도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금송리

금송 1리는 원동. 대방리 두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한 대방리. 원동. 송곡. 상송. 하송 등을 통합하여 금송리라 하였다. 감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8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릉군 감천면 금송 1동으로 분동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금송 1리는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원동과 등 너머 골짜기에 위치한 대방리는 서쪽으로 넓은 금송평야가 펼쳐 있고 997호선 지방도로와 제방 너머 감천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넓은 들로 광기 3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무등산을 경계로 농소면 대방리와 접하고 북쪽은 금송 2리와 평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김천시와 가까우면서도 교통은 불편하 여, 마을에서 997호선 도로까지는 약 900m 가량 되어 버스를 이용하자면 도보나 다른 탈 것을 이용해야만 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원동(院洞)
    • 임진왜란 때 벽진인 이약동의 손자 홍명이 낙향하여 사미정을 세우고 여생을 보내다가 그 후 김산군수 조송평이 사미정을 헐고 그 자리에 경렴서원을 건립하여 회암주자를 중심으로 하고 김종직. 최선문. 이약동. 조위. 김시창 등 향토 출신 오현을 배향하다가, 그 후 김천시 자산으로 이전하였다. 이 서원지로 인하여 원동이라고 부른다.
  • 대방리(大方里)
    • 면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1907년 벽진인 이유무가 입주하여 대방리라 하게 되었으며, 총 10여 가구에 벽진이씨들이 많이 사는데 사과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 이아리(爾雅里). 이화리
    • 1821년 밀양인 박세근이 입주하고 이아리가 이화리로 변했다 한다. 청백리 유악명의 묘가 있었다 하나 찾을 길이 없다.
  • 송곡(松谷)
    • 조선 세조 때 기계인 유익명이 입주하여 솔밭에서 무술을 닦은 곳이라 송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피란처라 하여 재산이 많은 석선달과 배선달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에 살았으며,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중을 들기 위하여 몰려들어 마을이 번성해지자 이 마을의 윗동네를 상송. 아랫동네를 하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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