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 밀양박씨가 집단으로 마을을 개척하여 살았고, 그 후 김처철이라는 선비가 선산 송림 율곡에서 이주해 와서 보니, 이곳에도 밤나무가 많으므로 그곳의 지명을 따서 밤실이라 불렀으니 지금의 농소면 월곡1리가 그 곳이다.
2013년 말, 경북 김천혁신도시 준공에 맞춰 사업지구에 속한 2개 면, 7개 리(남면 용전·운남·옥산·봉천·초곡리, 농소면 월곡·신촌리)에 걸쳐있는 혁신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행정구역 명칭 공모를 김천시민과 혁신도시 이전기관 임·직원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실시하였다.
율곡은 혁신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름으로 지역민에게도 친숙할 뿐 아니라, 앞으로 혁신도시에서 생활하게 되는 이전공공기관 직원들의 선호도 반영하여 김천혁신도시의 행정동 명칭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일부 편입마을
남면 옥산리
옥산리는 조선시대말까지 개령현 적현면 옥산동이였는데 1914년 모산동, 석정동을 통합해 김천군 남면 옥산동이 되었다. 1916년 운남동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긴 후 남면소재지가 되고 1971년 옥산동이 분리되어 옥산이 옥산1리, 모산이 옥산2리가 되었다.
옥산마을은 김해김씨집성촌으로 120가구 중 김해김씨가 27가구, 평택임씨 11가구, 성산이씨가 12가구이다. 조선시대에 개령현의 죄수들을 가두어두는 감옥이 있었다.
모산마을은 1500년대 말 판견사 벼슬을 한 임흥주가 경기도 여주에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이래 대대로 평택임씨 전적공파 집성촌을 형성했는데 지금도 전체 69가구 중 45가구가 평택임씨이다.
옥산
조선시대에 개령현의 죄수등을 가두던 감옥이 마을뒷산에 있어 감옥 옥(獄)자에 뫼산(山)자를 써서 獄山이라 했다. 조선 말 감옥이 없어진 후 마을 지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구슬옥(玉 )자로 바꾸어 옥산(玉山)이라 했다
모산
옛날 갈항사 스님이 마을 터를 잡아주면서 마을 앞에 못이 있고 마을 뒤로 산이 있으니 못과 산을 뜻하는 모산이라 하고 못지(池)자에 뫼산(山)자를 써서 지산(池山)으로 썼다고 한다.
신강들(세강들)
들 위쪽으로 용신(龍神)이 내려왔다하여 이름 붙혀진 신강못이 있어 신강들 또는 세강들로 불리는 마을 앞 농경지는 혁신도시 부지로 절반이 편입되었다.
배달이제방
못밑들 중앙을 관통하는 제방으로 그 형상이 다리를 닮았다하여 배달이제방으로 불린다.
남면 운남리
운남리는 조선시대말까지 개령현 적현면으로 속한 종상동이었는데 1914년 석정동과 지산동, 용전동의 일부를 합하여 김천군 남면 운남동으로 고쳤다. 1971년 종상을 운남1리, 석정을 운남2리로 했다. 종상마을의 이름이 바뀌는 일이 있었는데 1862년(철종13년) 이종상이라는 개령현감이 부임한 후 마을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다고 경호동(鏡湖洞)으로 고쳤다가 1864년 이종상현감이 이임한 후 종상동으로 환원되었다.
종상마을은 김천지방의 대표적인 진주강씨 집성촌으로 전체 132호 가운데 70호에 달한다. 진주강씨 학사공파로 통정대부 강정년이 1560년 성주에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내에는 강감찬장군의 부장으로 거란족을 섬멸하는데 공을 세운 은열공 강민첨장군을 배향한 숙청각이 있다. 또 임진왜란때 전주이씨 이익만이 경기도 양주에서 이거하고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곽의 아들 이익장이 1636년 이주해 전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했다. 석정마을은 순릉참봉을 지낸 백은눌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온 이래 수원백씨집성촌을 형성하였는데 지금도 전체 72가구중 55가구에 달한다.
운남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종상동과 석정, 지산, 용전의 일부를 통합하면서 마을 뒷산인 운남산을 따서 운남동이라 했다.
종상
용전마을에서 솟아오른 용이 이 마을로 와서 승천했다하여 따를 종(從)자에 윗상(上)자를 따서 종상이라 했다.
석정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마을 중앙 큰 돌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와 우물을 파고 마을이름을 돌석(石)자에 우물정(井)자를 따서 석정이라 하고 돌정지라 불렀다.
농소면 월곡리
용시마을은 조선시대말까지 개령현 농소면으로 속했고 1914년 율곡, 남곡, 못골을 통합해 월곡동이 되었다가 1971년 용시마을이 월곡2동으로 분동했다.
경주이씨와 전성전씨집성촌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 이정용이 1521년 낙향해 마을을 형성했다. 조선시대 개령현 농소면14개동을 관할하던 면사무소가 1906년 밤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용시마을에 있었다. 마을앞 들판은 1964년 군 공병부대 장비를 이용해 전국최초로 경지정리를 한 지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때 참석하기도 했다.
용전리
용전리는 용밭과 우래실로 구성된 마을로 혁신도시로 편입된 마을 중 유일하게 마을전체가 폐동되었다. 원래 용밭마을은 이웃한 우래실과 함께 혁신도시로 편입되고 봉천리 36-2번지 일대로 2009년 11월 14가구가 이주해 새로 용밭마을을 형성했다.
용전마을은 전체 70가구 중 60가구가 밀양박씨 복사공파 후손으로 시조로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마을의 지명인 용전 또는 용밭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뒷산의 밭에서 용이 솟아오르는 꿈을 꾸었다하여 용(龍)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용전 또는 용밭이라 했다고 한다.
용전마을 뒤 불당골산 아래에는 용전2리 우래마을이 있다. 우래못으로 불리는 못가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로 동래정씨 몽성공파가 주로 살았으며 옛날 부상역에서 개령 양천역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내왕했다고 하는데 우래라는 지명도 벗(友)이 오고 가는(來) 마을이라 하여 우래(友來)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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