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대덕면
섬계서원 뒤 경내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은행나무는 임진왜란(1592년) 때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에 불이 붙어 조금씩 타올라가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호미로 긁어 껐다고 하는데 4백년 전에 이미 노거수였음을 말해준다. 섬계서원은 1802년(순조 2년)에 창건하고 김녕인 백촌 김문기 를 주향하고 영월군수를 지낸 그의 아들 여병제 현석을 배향하며 동쪽 별묘에 지례출신 학자 반곡 장지도,그의 제자 절효공 윤은보와 남계 서질을 배향으로 향제한다. 1868년 국령으로 헐고 그 자리에 사적비를 세웠다가 1899년에 그곳에 강당을 짓고 1961년에는 세충사를 세우고 간막이를 하여 본래대로 4위를 제향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서산 정씨 소유로 서산정씨 6세손 사신이 김천시 봉산면(봉계)에서 추량으로 이거하고, 11세손 처우가 동몽교관을 지내고 만년에 이곳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이만큼 자란 것이다. 연대로 따지면 380년의 수령이다. 나무 아래 집이 있고 길이 났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피해가 없었는데 꼭한번 6.25(1950년) 를 예언이나 하듯 세개의 큰 나무가지가 한꺼번에 땅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선생을 배향(配享) 하기 위해 김령 김씨 문중에서 세운 것
봉곡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882에 위치하고 있다. 전래하는 <봉곡사중수사적비명>에 의하면 그 개창이 신라고찰이라 하였다. 즉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도량을 개기하고 이어서 고려초 도선 국사가 중수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휴 대사에 의하여 기록된 <봉곡사 사적>(1685년)에는 동상실화재시(1717년) 습득한 상량문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 천수 5년(922) 도선국사 개창이라 하였으므로 그 개기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영유대사는 사적을 편찬하고 나서 13년후 봉곡사 주시 현윤대사의 간청으로 사적기를 다시 재록하면서 자장대덕의 창설에 고려초 도선국사 중창으로 수정했는데 이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봉곡사 사적>에는 봉곡사가 가장 왕성하였던 1700년대만 하여도 18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을 위시하여 동산실과 그 동의 요사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