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의 서안에서 모암산 중간지점까지의 시가지 지역 일대인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신기·하신기로 일제시대에 상신기는 나시키마치(錦町), 하신기는 혼마치(本町)·아사히마치(旭町) 등 일본식 이름으로 명명되고, 광복후에는 우리말 이름 용두동(本町)·감호동(旭町)·모암동(錦町)으로 고치고, 1993년에 감호동과 용두동을 합하여 용호동(龍湖洞)이 되고, 1998년에 용호동과 모암동을 합하여 용암동(龍岩洞)이 되었다.
용호동
김천시의 동쪽으로 보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내의 서안에 접하여 있다. 국도를 경계로 하여 남쪽이 용두동, 북쪽이 감호동이다. 용두동의 남쪽은 황금동의 주거지와 연접하여 있으며 북쪽은 감천과 합하여 흐르는 직지천(直指川)이 신음동과 마주하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랫장터·짐천장·김천시장 혹은 하신기(下新基)라 불렀으며 전국 5대 시장의 하나였다. 1905년 무렵 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를 놓을 적에 일본인 기술자 수백명이 임시로 거처할 집을 지었다고 한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도 임시로 지은 집을 헐지 않고 그대로 남아 차츰 상가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인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권을 차지하였다.
국도를 경계로 하여 감천의 남쪽을 혼마치(本町), 북쪽을 아사히마치(旭町)라 하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 정식 마을의 이름으로 확정지어 불렀다고 한다. 광복이 되면서 우리말로 마을의 이름을 고쳤는데 본정을 용두동, 욱정을 감호동이라 하였다. 다시 1983년 김천시의 조례에 따라서 감호동과 용두동을 합하여 오늘날의 용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르자면 행정동 이름이 용호동이고, 법정동으로는 여전히 감호동과 용두동으로 나누어진다.
땅이름의 보기를 살펴보면 용(龍)과 관련한 예가 많이 나온다. 이는 물신으로서 용을 섬기는 용신앙의 바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 용을 구체적으로 관련 짓는다면 다름 아닌 감호 곧 감천의 물로 보아야 한다. 법정동의 이름과 그 유래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용두동(龍頭洞)
- 아랫장터 혹은 하신기라 하여 전국 5대 장터의 하나인 김천장의 요람이다. 입천장소리되기에 따라서 흔히 짐천장이라고 이른다. 1916년 무질서한 시가지 정리를 하였는데 당시에 233채나 되는 집이 새로이 지어졌다. 이 때 김천면의 예산 15,350원(圓)의 예산이 들었다고 한다. 바둑판과 같이 잘 정리된 시가지는 오늘날에 와서 주택가로 변하였으나 본래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 마을 유래에 대한 현지 주민의 제보된 내용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이 마을은 감천 제방 부근의 지형이 용머리와 같다 하여 용두동·용머리라 하였다 한다. 날이 가물어 한발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모래를 쌓아 놓고 기우제를 지냈으며 장날에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일찍이 용두동의 감천 백사장에서는 연중 행사로 전국 장사 씨름대회를 해 왔으며, 옛날의 감천내는 수량이 많아 소금배가 드나들어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상업이 번성하였다. 지금의 감천교는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김천시민들이 나와 다리 밟기를 하였고, 1천번 이상 반복하면 일년 내내 무병하다는 전설이 있다.
- 감호동(甘湖洞)
- 김천 시가지를 관통하여 흐르는 감천 서쪽에 자리하여 있으며 강건너 지좌동과 마주한다. 남쪽은 같은 행정동에 속하는 용두동과 연접하여 있고, 북쪽은 서에서 동으로 관류하는 직지천이 북쪽끝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흐른다. 강 건너는 신음동으로 응봉(鷹峰)으로 가로 막혔으며 서쪽은 모암동 시가지와 연결된다. 감호동 전지역이 옛날 김천시장터였으니 지금도 감천 냇가 쪽은 공설시장이 자리하여 있다. 마을 형성의 과정은 앞서 풀이한 내력과 같다. 옛날 감천의 하상에 둑을 쌓아서 이루어진 마을인데 과거에는 감천이 현재의 김외과의원 부근과 김천의료원 앞에서 늪과 호수가 되어 흘렀는데, 1920년 무렵 일본인들에 의하여 제방이 만들어진 후 마을이 형성되어 1930년에 욱정(旭町)이라 불리었다가 광복 후 감천의 감자와 호수의 호자를 따서 감호동이라 개칭되었다 한다.
- 면적은 0.06㎢이고 인구는 약 2천 명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감호공설시장은 김천 지방의 해산물 거래의 중심시장이며 5일마다 열리는 정기시장에서는 원초제품 및 개·닭·토끼·오리 등 가축의 매매가 성했다. 감호시장의 점포 전용화와 감호제방이 포장되어 우회도로가 개설되면 옛날같이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시장으로서 번영이 다시 기대된다.
- 마을이름 '감호(甘湖)'라 함은 감천과 직지천이 만나 이루어지는 하상작용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감호의 '감'은 감천이며 호(湖)는 물을 뜻함이니, 앞선 풀이에서 감천의 '감'이 가운데라고 하였다. 그러면 감호동이 지난날 김천 시가지의 중앙이 됨은 당연한 귀결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모암동
마을 가운데에는 모암산이 앉아 서쪽 성내동까지 뻗쳐 있고, 산의 북쪽 기슭으로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남으로는 경부선을 중심으로 하여 남산동과 연접하여 있으며, 북으로는 서에서 북으로 흐르는 직지천을 연접하여 신음동과 이웃하여 자리하고 있다. 일정 시기에 상권을 장악한 일본사람들은 1908년에 마을이름을 일본식으로 니시키마치(錦町)라 하였다. 이 시기에 김천역과 아랫장터를 잇는 국도가 개설됨에 따라서 모암동은 아주 빠르게 시가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김천시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자산의 동·남·북 삼면을 에워싼 상가 및 주택지구역이다. 1901년까지는 인가가 없었고 자산을 사이에 두고 동으로 흐르는 감천과 남으로 흐르는 직지천의 합류지점으로 대부분이 소택지이고 군데군데 저습답이 있을 뿐 인접한 천변에 장날이면 지금의 감호시장인 장이 설뿐이었다.
그 이후 일본인들의 상가가 점차 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김천 상가의 중심으로 발전되어 갔다. 1914년 김천면 금정으로 일본식 동명이 붙여졌고 광복후 1947년 자산 동남쪽에 우뚝 솟은 사모바위 일명 삼바위를 지명으로 삼아 마을이름을 모암이라 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성내동
성내동과 모암동에 걸쳐서 가운데 앉은 산을 이르러 자산(紫山·尺山)이라 한다. 산의 남쪽은 언덕배기인데 옛부터 큰 마을이 있어 자산 마을이라 불렀다. 동으로는 모암동 시가지와 이어지고 서로는 평화동과, 남으로는 남산동과, 북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내리는 직지천을 경계로 하여 신음동과 마주한다. 공공기관으로는 교육청이 있으며, 자산 마을 밖으로는 상가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오늘날의 중앙초등학교에서부터 철도 건너 시교육청으로 능선이 이어져 있으며, 자연부락이었던 자산마을이 있을 뿐이었다. 1905년 무렵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뒤이어 국도가 만들어짐에 따라서 1920년을 전후하여 시가지가 이루어졌다. 1909년 일본식의 마을이름을 붙이면서 죠나이마치(城內町)라 하였다가 광복 이후에 우리말 식으로 하여 성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62년에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다가 1983년에 이르러 시조례에 따라서 통합하여 오늘날까지 그리 부른다.
- 뒷방마
- 현재의 성남교 부근에는 옛날에 방앗간이 있었고 삯을 받고 마차로 짐을 날라다 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마방이 여럿 있었는데 이 마을이 위치로 보아 역뒤쪽에 있는 마방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을 뒷방마라 하였다 한다.
- 성안·성내
- 이 마을은 김천역(驛站制) 안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성안·성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상신기동과 갈마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내정이라 했다가 1946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식으로 고침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쳐 성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자산(紫山·尺山)
- 이곳에 있는 산의 바위가 해질 무렵이면 자주색 빛을 낸다 하여 이 산을 자산이라 했다 한다.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부터 이 자산을 서서히 깎아 그 자리에 마을이 이루어지자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자산이라 했다고 한다.
- 물령동
- 지금의 교육청 앞 한길 건너쪽 충혼탑 아래에 물명못이란 못이 있어 그 일대를 물명동이라 했고 일제시대에 못이 매립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자산동
2008년 9월 30일 중앙정부의 소규모 행정동 통합방침에 따라 용암동과 성내동이 자산동으로 통합되었다. 성내동과 모암동에 걸쳐서 가운데 앉은 산을 이르러 자산(紫山·尺山)이라 하는데 4개동(감호,용두,모암,성내)의 화합을 위해 행정동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